추사고택
새해 벽두부터 휴식차 도고온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고온천을 중심으로 이곳저곳 둘러보고 여독은 온천물에 씻어내 버리자는 취지로 이웃과 함께 떠난
겨울여행이다.
1월 2일 도고에 자리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추사 김정희선생의 생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추사고택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한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고택은 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밖에도 추사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홍문이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미터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 나라에 몇 그루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이상 인터넷에서 발췌>
<추사고택을 설명한 안내문판과 매표소>
<추사고택의 대문:역광을 받아 화질이 엉망이다>
<고택을 들어서기 전 잔디밭에 조성된 추사시비>
<마당에 들어서면 기둥마다 걸린 주련이 눈길을 끈다.>
조선후기의 학자·서화가·금석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가 추사 김정희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慶州)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의 문하생으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신례원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추사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은 단순히 태어난 곳을 얘기하는 생가와 달리 문화적으로 보존해야할 가치를 지닌 집이다.
김정희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충청도 53현에서 한 칸씩 지은 53칸 집이었으나 행랑채 19칸이 손실되어 현재 34칸만 남아있다. 추사고택은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지고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는 명당 터에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다.
<불후의 명작 '세한도'의 모조품이 걸려있다.>
사랑채에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이 걸려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뜻하는 세한도는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스승을 찾아온 역관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빳빳한 털로 만든 그림붓으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없는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추사체로 쓴 발문이 그림의 격을 높여준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의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일본인 학자 후지즈카가 인수해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호남갑부였고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은 매입에 실패한 뒤 매일 찾아가 끈질기게 괴롭힌 끝에 다시 찾아왔다.
<안채로 들어서기 전에 들여다 본 안채의 모습>
<안채에 있는 침실의 모습>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주련은 2개의 글귀가 모아져 하나가 되고, 추사고택 42개의 기둥에 추사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은 주련 21개가 걸려있는데 그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가 너무나 유명하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희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 유배살이로 점철된 생을 살았지만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이나 완원에게 경술문장이 바다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받았을 만큼 부러울 것이 없는 영화를 누렸던 추사가 71세의 늙은이가 되어 깨우친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진리가 글 속에 담겨 있다.
고택 안채에 나무 한그루조차 조경된 게 없다.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모양의 집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는 게 이유다. 또 안채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다. 이것도 왕실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진다.
사랑채 앞에는 추사가 직접 글씨를 써서 새겼다는 '석년'이라는 빗돌이 모란(목단)을 배경으로 서있다. 석년은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의 한 종류다.
<고택의 뒷편에는 추사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잠시나마 선생의 높은 학문을 기리며 분향을 했다.>
<사당 뒷편의 소나무 숲 사이로 짧은 겨울해가 떨어지고 있다.>
<추사선생의 묘와 비석:선생을 부르는 호가 200여개나 되었다는데 이 비문에는 완당이라는 호를 쓰고있다.>
대부분의 집터와 묘터는 양택지와 음택지로 나뉘어져 떨어져 있는데 추사 선생의 묘지는 고택과 인접한 뒷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명성에 비해 작은 석물과 비석이 오히려 깔끔했던 추사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무덤 앞에 있는 다복솔이 주변의 풍경을 아름답게 한다.
고택에서 백송으로 가는 길가에 화순옹주 정려문이 있다. 영조는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 죽은 후 딸인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히 이곳까지 내려온 영조가 딸에게 밥을 먹으라고 명했지만 뜻을 거스르고 굶어 죽는다.
그 당시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게 큰 죄이므로 정려문을 하사하지 않았는데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가 정려문을 하사해 임금의 핏줄로는 유일한 정려문이 이곳에 생겼다. 정려문 옆으로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월성위 묘의 비석이 어필이다.
<묘소앞의 소나무가 걸작이다.>
고택에 가면 추사가 손수 심었다는 백송을 봐야한다.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은 180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수행했던 추사가 연경에서 돌아오며 가지고 와 고조부 김홍경의 묘 입구에 심어놓은 것으로 옆에 있는 키 큰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이번에는 보기만 하고 찍지를 못했는데 왜그랬는지
여행하는 내내 찜찜한 기분이었다.
수령이 약 200년이 되고 높이는 약 10m인 백송은 지상 50cm쯤에서 세 줄기로 갈라져 자랐지만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있다. 전국에 5개 밖에 없다는 백송 천연기념물 중 영조가 하사해 서울 추사의 본집에서 자라고 있는 백송과 함께 추사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추사고택에서 사랑을 속삭이면 깨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서해안으로 가는 나들이 길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추사고택에 들를 수 있다. 이왕이면 문화유산해설사에게 고택에 대한 해설도 듣고, 역사의 향기도 느끼고, 사랑도 속삭이는 일석삼조의 여행길을 만들어 보자. 주변에 수덕사, 해미읍성, 간월암, 개심사, 서산마애삼존불 등 연계되는 관광지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