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지순례

이제 개발의 첫 삽을 뜨는 '요당리 성지'

대청마루ㄷ 2007. 1. 28. 18:28

장주기 요셉 성인과 최근 시복시성 추진 중인 장 토마스가 태어나 성장한 200년 신앙 땅, 요당리 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가 교우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뻔 했다.

민극가 성인과 정화경 성인의 발자취도 함께 아우르는 유서 깊은 교우촌인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를(1801년) 기점으로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수원지역 대표적 신앙 유산 중 하나라는 점에서 학계에선 오래전부터 주목해 왔다.

하지만 신자들의 관심 부족으로 현재 성지에는 복토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땅 6200여평과 표지판만 덜렁 있을 뿐이다.이에 수원교구에서는 이 성지의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고 김대영 베드로 신부를 이 성지의 주임신부로 임명하고 성지개발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2007년 1월 27일 토요일

절친하게 지내는 교우님과 찾아간 요당리성지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말뚝하나 박아놓은 무인지경이었다. 게다가 진눈깨비까지 내려 질척이는 비포장 도로를 조심스럽게 진입을 하자니 성지의 앞날이 걱정될뿐이다.

 발안에서 안중으로 난 3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청북I/C를 가기 전 우측으로 고잔성농원,박물관이 보인다.박물관 입구로 나와 지하도로 죄회전을 하면 요당리 성지를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2Km쯤 시골길을 달리면 성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저 멀리 검은색의 비닐하우스가 보이는데 이 성지의 본당인가보다.

저 건물을 목표로 차를 몰아본다.

 방금내린 눈에 첫 발자국을 내며 다가가본다.

 

 임시막사처럼 지어진 건물이 분명 성당일테고 왼쪽으로 보이는 콘테이너 건물이 사무실 겸 신부님의 거처인 모양이다.

 그 맞은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동행하신 교우님도 사진촬영에 열심이다.

 본당 내부를 보니 이제 막 들여놓은 집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역시 인기척은 없다.

사무실에서 인기척이 보이더니 신부님을 도와 일을 하신다는 자매님이 차를 대접하시면서 이 성지의 역사와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신다.

신부님은 연일 앵벌이(타 성당에 가서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말하는 신부님들의 은어)를 나가시는데 오늘은 인계동 성당에 가셨다고 한다.

정말이지 사제라는 직업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된다.

 지형상으로 보아 저 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성전을 세우면 딱 좋겠다고 말했더니 누구나 그렇게 이야길 하는데 그 웬수같은 돈이 없어서 토지를 구매 할 수 없다고 하신다.

 

▨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03년 요당리(느지지)에서 출생한 장주기 요셉 성인은 이 곳에서 성장하며 세례를 받고(1826) 가족과 일가 친척에 복음을 전했다. 1843년 박해를 피해 배론성지(원주교구)로 이주(1843)한 성인은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이후 병인방해(1866)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성인은 1866년 3월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 현 갈매못에서 64세 나이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회장 등과 함께 참수치명 당했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 성 스테파노 민극가(閔克可)는 인천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사망한 후 부친이 중년에 이르러 가족과 함께 입교하였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부친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몇 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이 또다시 사망하자, 집을 떠나 서울, 인천, 부평, 수원등지를 떠돌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나갔다.  교회서적을 베껴 주기도 하면서 얻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애긍에 이용하였고 그의 열성과 박애정신을 보고 신부들의 회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외교인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자선사업에도 회장 임명 전보다 더 열심히 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던 중 12월에 서울 근교에서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 그리고 유혹 등을 모두 물리치고 신앙을 지켰으며,배교하면 석방시키겠다는 형리들에게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전교하겠습니다"라고 말하여 형리들의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었다.

 

1840년 1월 30일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여 영원하신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