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삼국시대 古城 - 당성(唐城)

대청마루ㄷ 2011. 12. 7. 17:29

당성(唐城)

사적 제217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1

2011.12.7

 

당성이라는 이름을 안 것은 몇년이 지났건만 그동안 발걸음을 하지 못한건 거리가 멀어서도 아니요, 가치가 없어서도 아니다.

우리나라 성 이름에 왜 하필 당나라 唐을 썼느냐 하는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해서였던 것.

실제로 나에게 처음 이 성을 알려줬던 이는 당나라에서 축성한 성이라는 설명을 해주었기에 나도 한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긴 저 먼 날 삼국시대에 축성되었고, 이 성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당나라 군사들이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몇년에 걸쳐 석성을 쌓을일이 과연 있었을까?

 

 

당성 주차장에 도착하면 당성사적비가 반긴다.

 

수원에서 남양을 거쳐 대부도입구까지 난 4차선 도로를 달리면 제부도까지도 순식간에 갈 수 있는 요즘이다.

이 길로 남양과 송산면 소재지인 사강을 거쳐 대부도로 가기전에 전면에 터널이 보이는데 그 전의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2차선의 옛길로 들어서게 된다.큰도로와 나란히 뚫린 이 터널은 사실 콘크리트로 터널을 만들어 흙을 채워놓은 야생동물 이동통로인데 이 터널을 지나서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당성이라는 팻말이 나타난다.이곳에서 좁다란 산길을 3분쯤 올라가면 당성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널찍한 초지가 보이는데 이곳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성 시대에 군사를 조련하던 훈련장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성을 오르는 길은 가족단위 산책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완만한 경사에 바위가 없는 육산이라 그만큼 수림도 좋기 때문이다.

 

성문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지만 성문을 이르기 바로전에 이런 은행나무 숲이있어 가을이면 색채의 장관을 볼수도 있겠다.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60년대에 세운것으로 보이는) 사적 지정 기념비가 잡초속에 묻혀가고 있다.

 

우물터 옆에는 갯버들처럼 보이는 나무가 운치있게 우물을 지키고 있다.

 

우물터는 작은규모로 성이 폐쇄된 이후에도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복원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옛 규모가 드러나겠다.

 

우거진 수풀 아래에는 성곽에 사용되던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성을 돌다보면 곳곳에 중간문으로 보이는 통로들이 있다.

 

성안에는 조사시에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깨어진 기왓장들이 쌓여있다.

 

왼쪽으로 난 제법 큰 길을 따라가본다. 이 길은 아마도 복원작업을 할때 사용하던 길로 보인다.

 

 

  수없이 보이는 돌무더기들은 그엣날의 잔해와 복원공사에 쓰일 것들이 섞여있을 것이다.

 

복원된 성곽의 남쪽부분이다. 이 성은 산의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바깥쪽은 돌로 담을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워진 모양이다.

 

성을 돌다보면 이렇게 평화로운 산책로가 이어져 아직 본격적인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가족단위의 소풍을 오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남쪽 성벽에서 바라보면 저너머 서신 들녁이 평화로이 펼쳐져 있다.

 

아직도 시들지 않은 으름덩쿨이 여름에 한번 더 와보라고 손짓을 하고

 

이곳에도 성문지(남문지)가 있고

 

이 성의 가장 높은곳 망해루를 오르는 길이다.

 

뭍이 된 바다들녘 너머 대부도가 보인다.애초 저 들녘이 바다였기에 이곳은 서해로 나가기 위한 중요한 항구였을지도 모른다.

대부도라는 길다란 섬이 천연의 방파제가 되어 주었을 것이고 드넓은 화성땅에서 나는 농산물과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실어나르는 중요한 항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성땅은 어디가건 공장이다. 공단을 조성하여 합리적인 관리를 못하는 화성의 실체이다.

 

아직 복원이 되지않은 망해루쪽의 성벽

`

가장 높은곳에 초소를 겸한 전망대를 지었던 곳이다.그 누각이름을 망해루(望海樓)라 하는데 기록에 있는 것인지, 추정으로 지은 것인지..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망해루는 복원을 기다리는 돌무리가 있다.

 

널찍한 망해루터

 

망해루에서는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길이다.

왼쪽으로 성의 흔적만 보이는 잡초만 무성한..

 

허허..이길이 아닌가?

 

다시금 망해루로 올라와 왔던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우물터까지 내려가 오른쪽 성벽을 찾아 올라가본다.

 

허허..중앙으로 올라가보니 윗쪽으로 성벽이 이어지고

 

성벽은 망해루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곳곳에 보이는 움푹파인 통로는 성문터임을 짐작케 한다.

 

 

밖에서 본 성벽 / 이길로 오르니 다시 망해루이다. 결국 망해루를 두번 오른꼴이네..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가니 복원구간이 끝나고 저 건너에 정문에서 보면 왼쪽으로 복원되었던 성곽이 보인다.

 

 성안에는 현대에 구축한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깨어진채 나뒹굴고 있다.

 

 다시 우물터로 내려와 윗부분이 잘린 나무를 담아둔다. 결국 이날 우물터를 세번이나 방문한 꼴이다..

 

내려가면서 본 은행나무 군락

 

 

[다음의 글은 데일리안 최진연 기자의 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고봉산(170m)위치한 당성은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산의 생김새가 이름처럼 9봉우리가 바닷가로 병풍처럼 길게 늘어졌다,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경계인 높지 않는 구봉산정상에서 계곡을 따라 성벽이 쌓여있다. 정상에서 보면 북서쪽에 화량진성, 북쪽은 해운산봉수, 서남쪽으로 염불산봉수, 남쪽으로 백곡리산성과 청명산성 등 모두 3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성벽은 축성시기가 다른 3중성으로 구축됐다. 첫 번째 축성된 성벽은 구봉산의 정상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을 따라 테뫼식으로 쌓은 삼국시대 성벽이다. 둘레는 363m이며, 외벽높이는 5m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망해루 아래 북쪽에서 동쪽으로 꺾어지는 부분에 성벽이 노출됐는데 사각으로 다듬은 화강암을 석재로 쌓아올렸다. 이곳에서는 신라유물이 출토됐다.

 

 

두 번째 성벽은 이곳 중간부를 뚫어 동쪽과 남쪽능선을 따라가면서 1km 조금 넘게 쌓은 포곡식 성벽이다. 지금까지 내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정상의 테뫼식 산성이 규모가 작아 통일신라 말기에 새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높이는 4m 정도이다. 당성성벽은 안쪽은 흙으로 쌓았으며 바깥은 돌로 쌓아 올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성벽이 멸실되었으나 최근 북쪽을 제외 하고는 복원이 완료됐다.

계곡 출입구에 동문터와 수구, 내부에는 건물지와 우물이 현재 남아있으며, 높은 지형에 북문터와 염불산으로 가는 방향에 서문터가 있다. 정상에 망해루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신목이 있는데 여기에 성황당이 있었다. 산성이 폐성되자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성황당을 세워 스러져가는 나라의 국운을 빌었다.

 

외성은 모두 흙으로 쌓았는데 동북쪽 성벽 바깥에 흔적이 보이며, 서문터에서 신흥사 가는 길에도 토성의 일부가 보인다. 당성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문토기와 돌을 갈아 만든 석촉이 발견돼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는 신라의 생활용기들이 주로 출토됐으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조각들도 많이 발견됐다. 당성의 출토유물 중 특이한 것은 토마와 철마다. 이 유물들은 고대산성에서 가끔 발견되는데 현재까지 그 용도와 기원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당성은 보잘것없지만 삼국시대 때는 위세가 대단했다. 지형도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당성일대는 육지가 됐지만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크게 달랐다. 삼면이 바다였고, 동쪽만 육지와 연결된 갯벌이었다. 밀물 때는 물이 들어와 완전한 섬이 된다. 바닷물에 감싸인 당성은 적이 침입 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로 변해버린다.

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대에 성곽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모든 권력은 성으로부터 나왔고 모든 재화도 성으로 모여들었다. 성곽은 일대를 다스리는 행정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고려와 조선도 모두 한 번씩 거쳐갔다. 삼국 중에서 가징 열세였던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위해서는 당나라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당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 남양만에 있는 당성이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중국의 경제와 문화가 당성으로 모였다. 신라최고의 무역항이 된 것이다.[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