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찾아간 부여 정림사지(2011.12.14)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 9호)
정림사지(사적 제 301호)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제 108호)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계한 휴가라면 하루를 받아도 3일 연휴가 되어 유용하게 사용을 할 수 있는데 업무 특성상 자리를 비우기 곤란한 일 때문에 주중 딱 중간인 수요일에 하루 휴가를 받다 보니 자칫하면 아무것도 못한 채 하루 휴가를 무의미하게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다. 하여 오늘도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카메라를 대동하고 짧은 여행길에 나서본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겠다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주섬주섬 챙기고 나니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낮 12시 반이나 되어서야 집을 나서게 됐다.
화성-평택 고속도로를 달려 평택 오성에서 평택-음성간 고속도로를 올라선다. 간간히 흩뿌리는 겨울비가 조금 부담스럽지만 차는 막힘없이 달릴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에 진입을 하여 천안에서 논산으로 난 민자고속도로를 달린다. 남공주 나들목을 빠져나와 부여방향으로 가는 40번 국도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다. 부여읍내에서도 막힘이 없어서 정림사지에 도착한 시각이 14시 정각이니 집에서 부여 정림사지까지 소요된 총 시간이 1시간 반이다. 그야말로 이제 전국 반나절 생활권이라 할 수 있겠다.
<정림자시 오층석탑의 위용>
부여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제법 굵기를 더하여 우산 없이는 운신이 곤란한 지경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비를 예상한 복장이었기에 주저없이 차에서 내렸지만 내리는 빗방울은 야속하게도 카메라를 괴롭힌다.
정림사지는 차도에서 들어가는 입구가 애매하여 처음 잘못 갔다가 되돌아와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찬란한 문화로 동방의 문화종주국 지위를 만방에 과시했던 백제국은 왜 이렇다 할 기록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속에 사라져 버렸을까? 무릇 역사란 살아남은 승자의 편에서 쓰여졌기에 그렇다고 하여도 훌륭한 문자와 인쇄기술까지 보유했던 그 찬란한 문화가 이제는 땅속에 남아있는 소량의 파편들을 조각모음 하여 유추를 해야 할 형편이 개탄스럽다.
부여는 백제 초기의 도읍으로 한강에서 시작한 도읍이 공주를 거쳐 다시 남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아 국력 쇠퇴기에 천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라사정을 짐작케 한다. 백제의 성왕은 당시의 웅진이었던 공주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까지 백재의 중흥을 도모했지만 신라와의 관산성(충북 옥천)전투에서 전사를 하게 되고(554년), 그로부터 106년 뒤인 660년 이 사비성(538~660)은 백제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마감하는 마지막 도성으로 이름이 남게된다. 사비성은 122년간 후기 백제의 도읍이었는데 문화적으로 이때가 가장 중흥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가 쓰게 되고, 그 승자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 하여도 후세의 참략자가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결국 후세에 집필된 역사도 그 찬란한 문화를 흡수하여 힘을 기른 뒤 침략자가 된 일본에 의해 흔적까지도 지워져버린 것이다. 지워져 버린 정도가 아니라 왜곡이 되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백제를 침탈한 명분을 찾기 위해서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폄하할 필요가 있다. 삼천궁녀 이야기가 바로 그것 아닌가? 삼천의 군사를 모으기에도 역부족이었던 전시상황의 왕궁에 삼천의 궁녀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얼마나 허무맹랑 이야기 인지..
정림사지는 백제왕실의 중심사찰이었다. 불교의 나라 백제에는 이 외에도 여러 사찰이 있었지만 후기 백제의 중심이 된 사찰이 이곳 정림사라는 것은 왕궁과 지척을 이루고 있는 위치로 미루어 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백제는 이 곳에 정성을 다하여 사찰을 짓고 부처님께 나라의 중흥을 빌며 절치부심을 했을 것이다. 이제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속에 모두가 흙이 되고 말았지만 육중한 돌탑만큼은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나라잃은 설움을 가르치고 있다. 허허벌판이 된 옛 가람터에 홀로 남아 풍파를 견디고 있는 오층의 돌탑은 멀리서 보기에 그다지 크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한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반듯한 용모와 작지 않은 몸집에 감탄을 하게 된다.
현재 정림사지라고 담장을 둘러놓은 절터는 당시의 반도 못되는 면적일 것이다. 강당터에서부터 오층석탑을 거쳐 내려가면 연못이 있고 그 앞에는 중문과 이어진 돌담이 있는데 절에 딸린 수많은 부속건물은 어디에 있었을까? 강당터 양편으로 있었던 건물이 요사채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건물들은 어디에 지어져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나의 의문일뿐이지 내로라 하는 학자들의 결론을 믿는 수 밖에 없다. 강당터 양편에서 앞쪽으로 회랑이 늘어져 있고 장방형으로 배치된 가람은 상당히 웅장했을 것이다. 학자들이 연구하여 모형으로 제작된 정림사의 강당은 3층구조이다. 이 모형이 실제크기로 복원되는 날 정림사는 백제역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비는 내리지만 혼자서 탑돌이를 한다. 불자들이 하는 신앙의 탑돌이가 아닌, 모습을 눈에 담기위해 눈도장을 찍는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단 1분만에 마친 일을, 혼자여서 지유로운 나는 30분동안 했다. 탑의 뒷부분에 최근에 세운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석불좌상(보물 제 108호)을 보호하기 위해 1993년도에 지은 것이라 한다. 이 석불좌상은 마모가 심하여 상세한 모습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백제의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얼굴임을 알 수 있다. 이 석불좌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 만큼은 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절의 백제시절 이름은 알 수가 없고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왓장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귀가 발견되어 고려 현종19년 (1028년) 에 정림사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다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고 적혀있다. 결국 백제시절에 건축되었던 건물은 다 사라져 흙이 된 뒤 몇백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명당터였음이 입증된 셈이다. 현재 이 절터의 앞에는 부여중학교와 백제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석탑을 돌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생각해본다. 당시 신라와는 해볼만한 싸움에 당나라라는 거대한 나라와 엽합을 한 대군에 밀려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백제라는 나라. 이제는 그들이 두고 드문 유적을 보며 찬란한 문화를 퍼즐 맞추기 해 볼 뿐이다.
<정림사지 주차장에 있는 부여군 관광지도>
<주차장에서 본 박물관>
<박물관 정문>
<박물관 건립문>
<박물관 안내도>
<정림사지 설명문>
<멀리서 본 오층석탑>
<중문 앞에 있는 정림사지 안내도>
<연못에서 본 오층석탑>
<정면에서 본 오층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안정된 구조의 걸작이다>
<형상이 많이 마모 되었지만 온화한 백재의 미소를 간직한 석불좌상>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좌대>
<오층석탑과 석불좌상 보호각>
겨울비는 끊임없이 방문자를 따라 다니지만 정림사지를 위해 건축된 박물관을 둘러보지 않는다는 것이 어쩐지 허전하여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