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여행-부소산성과 낙화암의 전설을 따라(2011.12.14)
부여여행-부소산성과 낙화암의 전설을 따라(2011.12.14)
부소산성: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호
소재지: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구이리,구교리 일원
백제의 首都가 공주에서 부여로 옮겨진 것은 백제 후기인 성왕 때의 일이다. 이 천도가 고구려의 남하에 밀려서 이루어진 것인지, 전략적인 판단에 의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현재 공주에서 부여로 난 40번 국도를 통해 달려보면 두 도시간 길이가 40Km 남짓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피난이라는 개념 보다는 국민의 결속을 다지고 재도약을 하자는 뜻에서 계획한 신도시의 건설이 아니었을까?
이제 부여로 불리는 옛 백제의 도읍 사비의 지도를 살펴보니 공주에서 유유히 흘러온 금강을 따라 배수지형으로 펼쳐진 부소산과 그에 의지하여 민가가 펼쳐진 전형적인 도시의 형태이다. 내가 보기에 공주나 부여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지형구조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다만 남중국의 양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나라의 특성상 서해와 이어진 금강의 뱃길이 더욱 가까워지는 등 해양왕국으로의 토대를 마련하자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평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발걸음을 옮겨보자. 평일에 내린 겨울비의 영향인지 부소산은 쓸쓸할 정도의 한적함을 느끼게 한다. 오후 4시면 짧은 겨울 해의 특성으로 보아 늦어도 6시 이전에 주차장에 도착해야 한다. 친절한 매표원에게 어느 코스로 돌아야겠냐고 물으니 시간이 많지 않으니 왼쪽코스를 추천하겠다고 한다. 지도로 보아 오른쪽 코스로 돌면 여러 가지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겠으나 시간관계상 매표원의 추천을 따르기로 한다.
<부소산성 안내도>
<부소산성 안내문>
<산문 입구에서 오르는 길>
<낙화암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하동정씨 정려각>
<하동정씨 정려각-건물 내부는 비어있다.>
<부소산 서복사지>
주차장에서 출발을 할 때부터 흙 한번 제대로 밟을 수 없도록 포장해버린 산책로가 깔끔한 건지 불행한 건지 판단이 안 선다. 하여간 오늘의 목적지를 낙화암으로 잡고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본다. 산책로에서 스쳐만 가도 반가울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해발 100미터 남짓한 부소산을 오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부소산을 넘으니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이 깃든 낙화암이 나타난다. 낙화암을 가기 바로 전에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서있는데 망국의 설움을 안고 지는 꽃이 되어 강물 속으로 떨어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자는 뜻에서 부여지역의 시인들이 돈을 모아 지은 정자라는 안내문이 있다. 그 옆에는 "천년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나무가 정자를 호위하듯 지키고 있어서 숙연한 마음이 든다. 낙화암은 그 아래 푸른 강물을 굽어보며 서있는 수십 길의 바위절벽인데 아래쪽에는 우 암 송시열이 썼다는 落花岩이라는 명문이 바위에 새져 져있다고 한다. 망국의 슬픈 역사만 아니라면 참 좋은 풍경이다..
<낙화암에서 본 백마강>
<낙화암에 게시된 설명문>
<낙화암>
<낙화암>
<백화정에 걸려있는 편액>
<백화정에서 본 낙화암쪽 바위와 백마강>
<백화정을 지키고 있는 천년송 설명문>
<백화정과 천년송>
<고란사 전경>
<고란사의 호구와 강아지>
<고란사 극락보전 현판>
<고란사 노거수와 백마강>
낙화암의 전설에 녹아있는 승자의 역사왜곡을 또 한번 생각해본다. 백제가 패망하던 당시의 정세를 보면 분명 군사적으로 백제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두 나라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상태를 무너뜨리기 힘들다고 판단한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제압한다. 이 급박한 정세 속에서 과연 의자왕이 삼천의 궁녀와 쾌락을 즐겼을까? 2천의 군사를 잃고도 왕이 통곡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급박한 상황이라면 일반인의 군사적인 보급이나 수송에 관련한 부역이 시급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작은 한 왕국의 궁궐에 삼천의 궁녀를 부양할 여력이 있었을까? 나는 단연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삼천 궁녀 이야기가 일반화될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이 빗발칠 것이다.
<고란사약수 이야기>
<고란사약수-어두워서 플래시를 사용했는데 너무 밝게 찍힘>
<고란초를 웬 어항에?>
<고란약수 보호건물>
<고란사에서 본 낙화암 절벽>
<고란사 범종루>
현대에 와서 백제에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보면 군사적으로 주변국을 제압하던 이야기가 거의 다 지워져 있다.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지워진 것이다. 그 지워진 역사의 빈 패 이지를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쾌락을 즐기던 왕의 폭정에서 백제신민을 살리고자 당과 연합을 하여 제압을 했다”. 라는 말로 합리화 하여 오랑캐의 힘을 빌어 동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승자의 수치를 도배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숫자가 삼천이건 삼십이건 수많은 꽃들이 오랑캐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했던 이곳.. 수많은 인간의 영욕을 안고 푸른 백마강은 말없이 흐른다. 오래 머물고 싶지만 무심한 시간은 자꾸만 어둠으로 달린다. 여기서 잠시 갈등이 생긴다. 저 아래 고란사를 다녀가야 되나, 이대로 내려가야 되나? 쌍쌍이 짝을 지어 떠들썩하게 내려가는 학생들을 보며 용기를 내어본다. 돌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길을 내려가니 강물 바로 위에 작은 절 하나가 반긴다. 고란초와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이다. 언제 지어졌는지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전설을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 절 마당에는 호랑이 무늬의 虎狗와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데 이 호구는 사진만 찍어도 짖어대는 통에 정이 안 간다. 백마강변 바위 위에 지어진 절집을 둘러보고 마시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를 한 모금 마셔본다. 계절이 겨울이라 그런지 고란초는 볼 수 없고, 휑한 겨울바람만 드나드는 고란사를 나서니 벌써부터 내려온 땅거미가 발길을 재촉한다.
*역사학자가 아닌 나의 역사에 대한 소망*
- 중국의 요동지방이 백제의 중심이었음이 규명되길..(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억지주장에 맞설 강력한 반박이 될 것임)
- 역사학자들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일본에 대한 식민사관을 하루빨리 버리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한민족의 역사를 서술해 주길...(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억지주장에 맞설 백제의 일본 지배 등 사실적 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