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문화재]화성 궁평리 정용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24호)

대청마루ㄷ 2011. 12. 24. 11:20

화성 궁평리 정용채가옥-중요민속자료 제124호

소재지: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

 

<정용채가옥 전경/2011.12.24 설경>

 

<건물 외벽의 모서리를 특이하게 마감한 모습이다.>

 

 

화성 서신면 소재지에서 궁평리를 가다보면 해운 초등학교를 지나가게 된다. 예전에 수원에서 대부도나 제부도를 가려면 2차선 도

로가 너무나 막혀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태반이었을 때 궁평리를 가는 차량들은 남양에서 샛길을 타고 해운초등학교에서 좌회전을 하여 궁평리를 가곤 하였다. 이름이 다분히 낭만적인 이 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 해운리인데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조선시대 부농의 전통가옥이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다. 이미 일대에서는 이흔아홉칸집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직접 보진 못했어도 입소문으로 유명한 집이다. 이 집을 가기 위해서 해운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바로 좌회전을 하게되면 좁을 골목길로 고생을 하며 진입을 해야 하므로 이백미터쯤 가다가 나타나는 진입로에서 좌회전을 하는게 편하다. 야산 아래에 너른 들판을 바라보는 곳에 정남향으로 지어진 대 저택이다. 앞뜰에서 보면 정면 15칸의 행랑이 담장 역할을 하는 폐쇄적인 구조로 일반적인 한옥구조의 상식을 깨는 구조에 의아한 생각이 든다.

 

궁금증은 학자들이 풀어놓은 정답을 참고하고 이제부터 그 집안으로 들어가 본다.

 

 <북향으로 난 대문>

 

 <대문에서 들여다본 사랑채 앞마당>

 

 <사랑채 앞마당을 다시한번 찍어본다>

 

 <사랑채:현재 주인이 이곳에 실제로 살고있다.왼쪽으로 보이는 창호문 안의 방이 그의 거처이다.>

 

 <마당에서 본 대문쪽>

 

 <창고나 곳간으로 쓰였을법한 행랑채의 문>

 

 <안채가 궁금하여 슬펴시 들여다 보니>

 

 <주인께 양해를 구하고 안채에 들어가본다.>

 

 <사랑채에 비해 좀 좁은 구조의 안채>

 

 <안채의 대청마루>

 

 <부엌도 슬며시 들여다 보니 옛 추억이 뭉클..>

 

 <저 가마솥에선 밥익는 냄새가 솔솔..나는 쭈그리고 앉아 불을때던 그시절이 그립다.>

 

 <부엌에서 나는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배려한 나무창살>

 

 <안방을 들여다 본다.이곳 안채는 현재 사랑이 살지 않는다.>

 

<안채 대청마루와 댓돌 등>

 

<안채 대청마루 좌측벽에 걸린 가족 사진들>

 

<안채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전면 행랑채/마당 넓이가 사랑채의 절반정도로 좁은 편이다.>

 

<안채에서 왼쪽에 보이는 문을 열면 바깥마당으로 통한다.>

 

<사랑채 쪽에 면한 안채의 벽, 이 벽의 마감재로 보아 사랑채에서 안채에 침입하기 어렵게 대비한 흔적이 보인다.>

 

<다시 사랑채로/ 왼쪽 방에 보이는 분이 주인이다.>

 

<대문을 열어 고정시키는 고리>

 

<가옥 전면의 벽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하고있다.>

 

<바깥마당 한켠에 있는 화장실>

 

<맨 뒷쪽에 있는 바깥채, 남향으로 안채와 연결된 바깥채를 배치해 주부의 편의성을 고려한 모양이다>

 

<기와를 새로 교체할 때 나온 옛기와가 쌓여있다.>

 

<옛기와들>

 

<굴뚝 등 옛기와들>

 

 

<정용채가옥에서 본 들판/2011.12.24 설경>

 

<앞에서 본 가옥의 정면 모습/밖으로 어떤 창도 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사전의 내용을 옮긴 글]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솟을대문의 상량대 묵서명(墨書銘)에 1887년(고종 24) 문을 세웠다고 하였고, 안채는 이 문보다 약 50여 년 전에 세웠다고 하므로 대략 19세기 초엽에 창건된 집으로 추정된다.

이 집은 안산(案山)이 노적가리를 닮은 산이어서 누대로 재록(財祿)을 누릴 수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았다고 전해진다. 집 뒤의 배산(背山)은 나부죽한 동산이다.

마을에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뒷동산이 연이은 산세를 좇아 꼬불거린다. 산기슭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솟을대문에 당도하는데 대문은 북북서향을 하였다.

대문에서 보면 집은 한쪽만 보여 큰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대가이다. 안채·사랑채·바깥채·안행랑채와 대문간채까지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일견 작게 보이는 것은 집을 앉힌 좌향의 묘미에 있다. 서쪽의 동산은 좌우로 길게 퍼졌다.

집은 그 기슭에서 동동북향으로 앉았다. 즉, 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니 북쪽 대문에서 보면 장방형의 좁은 쪽만 보이게 마련이다. 이는 난세를 견디어내는 하나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이 집이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 나오고, 서쪽에는 사랑채가 동향하여 있다. 앞퇴가 있는 칸반통의 4칸 규모인데 방이 2칸이고 나머지가 마루이다. 사랑채 맞은편, 마당 끝으로 대문간채에 이어지는 바깥행랑채가 있다.

단칸통의 5칸이다. 사랑채와 안채와의 사이에 곳간채가 있다. 외줄박이의 4칸 규모이다. 이 곳간의 문은 안채로 향하고 있어서 사랑채에서는 뒷벽만이 보인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복도가 있다. 곳간채에 가려서 바깥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한 통로가 열린 셈이다. 이 구조도 다른 데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안채는 칸반통의 3칸 대청이 중심에 자리잡고 방은 그 왼편에 있다. 직절(直折)하면서 동편으로 3칸의 안방과 안방 남쪽의 뒷방이 전부이다. 안방에는 뒤퇴가 있고 뒷방 앞에는 쪽마루가 있다. 안방의 동쪽으로 큼직한 부엌이 있다.

안마당은 장방형인데 그 끝에 안행랑채 7칸이 있다. 행랑채에는 중문 한 칸이 있다. 측간 등의 부속건물이 있지만 이들이 배치된 윤곽은 {{#009}}형으로 통칭 月자형이라 부르는 길상형(吉祥形)이다. 명당에 좋은 집을 지었다는 평판을 들었다고 주인은 말한다.

[출처:네이버 지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