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와 삭풍으로 쓸쓸한 강화도 연미정(燕尾亭)
연미정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건립시기:고려시대
갈곳없는 현대의 실향민(고향에 아무도 안계서서)은 명절에 더 쓸쓸하다.
그렇다고 이 금쪽같은 시간들을 구들장 등짐으로 보낼수야 없지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그동안 못가봤던 강화도의 북쪽지역이나 더듬어 보기로 하고 집을 나선다.
명절 연휴의 나들이는 고향을 찾아 떠난 이들이 비워준 도로를 달리는 시원함이 있어서 좋다.
<연미정에서 본 북녘땅-노거수와 성벽이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강화대교를 건너 고려인삼센터로 바로 우회전을 하면 연미정 가는 해안도로가 바로 나오는 것을 그만 놓치는 바람에 시내쪽으로 한참을 더 들어가 우회전을 한다. 덕분에 어떤 문을 하나 찍었는데 이 시설물의 이름은 아직 모르겠으나 아마도 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곳을 탐방하는 이는 찾아볼수가 없는데 주차장에 차량이 즐비한 것은 주민들의 차량일터..
아차! 이번에도 또 카메라의 외부저장장치를 빼놓고 오는 실수를..
그나저나 홀로 다니는 겨울여행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오늘도 그냥 굶으며 다녀야겠다는 생각.
연미정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달리다 보니 저 앞에 돈대가 보이는데 혹시 저곳이 연미정인가?
다가가서 보니 연미정이 맞기는 한 모양인데 이곳저곳에 군사시설임을 알리는 경고문이 보이고 사진을 찍지 말라는 협박성 문구가 난무하여 도무지 사진을 찍을 마음이 나지 않는다. 이 문은 최근에 복원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도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듯.
기본메모리로만 찍다보니 사진을 몇장 찍지 못한다.
이 안내문판은 將武公 황형장군과 연미정에 얽힌 이야기를 적어놓은 글인데 참고가 될듯하여 담아왔다.
처음 이곳을 둘러볼때는 이 성곽이 그저 연미정을 둘러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연미정을 둘러보고 난 다음 월곶돈대를 가보려고 북쪽으로 가니 바로 검문소가 나타난다.검문을 하는 군인에게 월곶돈대를 가려한다고 하니 바로 내가 올랐던 성곽이 월곶돈대라 하고.. 그럼 월곶돈대 안에 연미정이 있다는 이야기네?
연미정(燕尾亭)이라 함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이곳의 지형이 제비꼬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미정을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는 노거수는 수령 500년이 된 보호수이다.>
헌데 지금은 연미정의 바로 남쪽 바다를 메워 지형을 변경하였으니 그옛날의 지형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山群은 북녘땅이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 나이 지긋하신 두쌍의 탐방객 중 한분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바다는 통제구역이라 물반 고기반이라고 하신다. 인간에게는 통제구역이지만 자연에게는 해방구인 셈이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협박성 경고문 때문에 군사시설이 보이지 않는 극히 제한된 풍경만 잡아본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메모리장치마저 없으니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접적지역만 아니었으면 아름다운 해변의 경치와 더불어 여름에는 상춘객으로 넘쳐나는 명소가 되었을법도 하다.
저 건너 보이는 북한의 산릉들을 거닐어 볼날은 언제나 오려는지..
아쉬움을 두고 떠나면서 좋은날에 다시 찾아올 것을 다짐해본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도 황씨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民統線) 이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98년도부터 제한이 풀려 출입이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