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백제 천년의 미소 뒤에는 보원사지가 있었다.(20140301)

대청마루ㄷ 2014. 3. 5. 22:11

백제 천년의 미소를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그동안 못가보고 자료로만 대했던 보원사터를 찾아봤다.

자동차로 계곡의 상류인 남쪽으로 1.5Km 가량 이동을 하니 이 산중에 상상도 못했던 넓은 공간이 펼쳐져있다.

이곳이 바로 백제를 거쳐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보원사의 옛터였던 것이다.

넓다란 절터에 남아있는 유물은 얼마 되지 않으나 그 규모로 보아 대 가람이었을 거이란 추측이 어렵지 않다.

사찰의 규모를 알게 해주는 당간지주와 정확히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탑이 서있고 아마도 그 뒤에는 대웅전이 자리 하였을 것이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103호)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103호, 높이 4.2m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이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바깥쪽에는 양측 가장자리를 따라돌대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하였는데,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는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구에서 본 보원사터

 

 

서산 보원사지
사적 316호, 위치: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48외 70필지
규모: 102,836 ㎡       시대:백제시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엇다고 전하는 대 사찰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었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탐(보물 104호),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105호), 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승탑(보물 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비(보물 106호),사찰에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 103호)가 있다.
가까이에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백암사지 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절터는 계곡으로 나뉘어져서 당간지주에서 절터로 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 옛날에는 건너는 석교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없어져서 차를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이동을 한다.

위의 사진은 발굴 현장에서 나온 여러가지 석물들이다.

 

보원사지 5층석탑(보물 제 104호)

 

보원사지 5층석탑
보물 제 104호
통일신라~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목조탑파에서 석조탑파로 변환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8부중상을 새긴것이 특이하다. 기단부에 우주(隅柱),탱주(撑柱)를 세웠고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1장을 끼워넣은 것과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여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양
화,보륜,보개,수련,용차,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68년 해제 복원시 사리 내갑(內匣),외갑,사리병,납석소탑 등이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대웅전이 있었을 넓다란 공간

 

그 맨 뒤로는 법인국사 보승탑비가 있다.(보물 제 106호)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탑


보물 제 105호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규모 : 높이 4.7 M
위치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
시대 :고려시대
재료 : 화강암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975년에 건립된 부도이다. 법인국사는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900년(신라 효공왕 4년)에 출생하여 15세에 장의산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968년(고려 광종 19년)에 왕사, 974년(광종 25)에 국사가 되어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에 입적하였다. 당시 임금인 광종이 슬퍼하여 부도를 세울것을 지시하여 국공(國工)에 의하여 세웠다. 이 탑은 팔각원당형의 형태이며 중대석 조각은 매우 아름답고 상대석에 난간 형태를 두른 것이 보기드문 특징이다.
옥개석 3단 받침을 둔 것은 보도나 탑을 막론하고 이 지방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며 추녀,서까래가 살짝 들어 올려져 날렵한 것 등은 탑에서와 같은 백제계 양식이다.

 

 

법인국사 보승탑의 왼편에 자리한 법인국사 보승탑비(보물 제 105호)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 106호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위치: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
시대:고려시대    재료:화강암
법인국사의 탑비이며 978년(고려 경종 3년)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다.
비몸 높이는 230cm, 폭 115cm, 글자수5000여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다.
이분은 신라만~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를받고 968년에 왕사,974년에 국사로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에 입적하였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 강화 작업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다.이분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교승 천여명이 엽접 했으며 이곳을 고산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다. 이곳으로 보아 어렸을 때 이곳에서 수도 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출토물들이 있는데 보호를 위하여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꾸만 관심이 역사속으로 들어감을 느낀다.

어떤이는 이를 가리켜 살날 보다는 죽을날이 가까워져가면서 변해가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도 한다.

미래를 연구하는 것은 돈이 되지만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돈을 까먹는 짓이라는데 그래도 나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직은 더 행복하니 돈 벌기는 애초부터 글렀던가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