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 긴글 모음

선바우 촌놈의 인천 체류기

대청마루ㄷ 2005. 8. 30. 09:29

그 당시 인천의 만석동은 주거지역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공장 틈새에 낀

노동자들의 임시 거주지역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 주거수준은 비단 만석동 뿐만 아니라 인근의 화수동이나 하인천쪽의 여타

마을도 비슷비슷한 수준이어서 안목이 좁은 나로서는 그곳이 절대 빈곤지역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얼마전에 출간된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보고

그 책의 무대가 이 마을들 중 하나라는 짐작을 해 봤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이 있어서

부산에 이어 우리나라 제 2의 항구도시로 성장한 곳이다.

나라의 관문인지라 풍부한 물자로 인하여 각종 중공업이 발달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야말로 맨손으로 흙집을 짓고 세간살이를 마련하여 연명을 하는

빈민촌이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들은 그들 특유의 끈기와 근면성으로 어느정도 부를 축적한

상태에서 국토 서쪽의 충남과 호남에서 몰려든 이들 노무자들은 보통 그 실향민들의

그늘에서 객지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때이다.

 

지금의 대우중공업 전신인 한국기계와 이천기계 사이로 난 휑한 한길에는

승용차 한대 보이지 않고 고철을 실은 대형 덤프트럭이 이따끔씩 지축을 흔들며 지나간다.

그 옆으로 난 공장 전용의 철로에는 사철 시커먼 색깔의 화물차만 검은 연기가 무섭게

용트림을 하는 공장으로 드나들었다.

 

짐을 허술하게 실은 트럭에서 어쩌다가 고철뭉치라도 떨어질때면

아이와 어른 상관없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서로 제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로 흥정을 해서 고철 판 돈을 나누어 가지곤 했다.

그 당시 아녀자와 아이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원목의 진을 빼기위해 대성목재 앞 바다에

담궈둔 커다란 통나무에서 껍질을 벗겨 머리에 이고,등에 지고 집으로 날라와

벽면에 차곡차곡 쌓아 두는게 일이었다.

연탄값도 빠듯한 빈민들의 겨울나기 준비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 미리 준비한 길다란 못을 철로위에 올려 놓는다.

그 육중한 기차 바퀴가 지나가고 나면 납작하게 눌린 못을 가지고 칼도 만들고,자석성분이

함유되어 요긴한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인천항의 부두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은 옷이 유난히도 두꺼웠다.

한겨울의 바닷가 칼바람을 피할 목적도 있었지만 그 안에 설탕을 비롯한 곡물류와 구리철사

등의 물건들을 몰래 숨겨 나와서 그것을 팔아 가용에 보태려는 목적도 있었다.

 

삶이 버거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이도 많았으며, 어이없는 사고 또한 적지 않았다.

건너편 철길옆에 살던 아저씨는 한시도 술에서 깨는적이 없었다.

그 아저씨는 술김에 칠길을 베고 자다가 처참하게 죽어갔다.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마을에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우물가에는 물을 퍼 가려는 행렬로 항상 길다랗게

줄을 서 있다.

4인용 푸세식 공동변소는 그야말로 초만원.

여름철 불량식품과 상한 음식으로 뱃속이 편한날이 없던 때에는 그야말로 그런 생지옥이 없었지.

시골에서는 집에 우물이 있어,질 필요가 없던 물지게를 날마다 지고 오르내려도 시골생활 보다는

이곳 생활이 훨씬 즐거웠다.

최소한 지긋지긋한 농사일을 안해도 되기 때문이다.

 

햇볕 들어올 창문이 없어 지붕의 한 복판을 뚫고 그 위에 투명스레트를 얹어 햇볕을

받아 마시던 굴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아저씨 아줌마들은 지금도 서로 인연의 끈을

놓지않고 서로의 회갑이며 칠순잔치에 빠지지 않는다.

다들 지독하게 살아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그들.

그들 삶의 뒤안길을 내 어릴적 기억과 함께 추억 해 보자니 가난은 했어도 정만은 넘쳤던

그 시절이 모든것이 풍족하여 오히려 화를 부르는 요즘보다 절대적으로 불행하지 않았음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