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사형장이었던 안성 죽산성지
죽산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로, 비봉산 동북쪽에는 죽주산성(竹州山城)이 있다.
이 죽주산성은 고려 때 몽고군과, 임란 때 왜적을 물리친 곳이다.
이러한 죽산에서 천주교 4대박해 중 하나인 병인박해(1866)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것이다.
▲ 성지 입구의 도로변에 세워진 죽산성지 표지석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스물 다섯분이나 된다.
이렇게 밝혀진 순교자 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현 죽산성지인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던 것이다.
▲ 고전적으로 새운 솟을대문에는' 성역'이라는 현판이 선명하다.
그 때 죽산에서는 어떤일이 있었을까?
스물 다섯분의 순교자에 관하여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순교자 '김도미니꼬' '여기중' '여정문'의
이야기는 참으로 애절하기 그지없어 여기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순교자 묘역이 있는 곳으로 순례자들이 오르고 있다.중앙에는 무명순교자들의 합장묘가 있고
그 양 옆으로 25인의 순교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김 도미니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에 숨어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안 마을사람 10여명이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찾아왔다. 이에 힘이 센 도미니꼬의 둘째아들은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
은 돌로 쳐죽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도미니꼬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도미니꼬는 여러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피눈물을 흘리며 딸을 그들에게 내어 줄 수 밖에 없
없었다.
▲ 중앙 계단아래 양 옆으로 서 있는 석등의 구멍을 통하여 본 돌 묵주알 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 것이다.
또한 여기중은 한가족 삼대가 한자리에서,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순교를 하기도 하
였다.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같은 날 함께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박해의 잔혹함은 법
조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 묵주는 장미를 뜻한다. 초기의 교회에서는 성모님께 드리는 간청을 장미꽃을 바치면서 드렸으
나 장미로 드리는 기도의 한계성으로 묵주알로 바뀌었다.
순교자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처형된 곳이 '죽산 순교성지'이다.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산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는 고려 때 송문주 장군이 지키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몽고군이 진을 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夷陳)터 라고 불렀다. 이진처에 진을 친 몽고군은 송문주
장군에게 패해 '사리티고개'쪽으로 달아났다.
▲ 무명순교자 묘를 참배하는 노 부부의 모습
이러한 유래를 지닌 '이진터'가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교우들 사이에서는 처절함이 서린 장소로 가슴에 새겨진 곳이
다.
▲ 아이들과 함께 순례를 온 교인들이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고 있다.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까지의 고난을 상징하여 14곳 마다 기도를
드리는 것.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 성지를 살펴보면 순교의 '사형장'으로서의 성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두들겨 때려 반 쯤 죽은 상태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성지는 죽산 순교성지가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 십자가의 길 제 2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죽산성지 주변에는 '두둘기'라는 곳이 있다.
행정구역상의 명칭으로는 '삼죽면 덕산리'로, 죽산성지에서는 약 15리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삼죽면 면소재지로 80여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박해당시에는 3,4호밖에 안되는
작은 주막거리였다.
▲ 십자가의 길 중간(7처와 8처사이)에 모신 예수상
두둘기라는 명칭은 지형이 조금 두둑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땅이 워낙 진흙이어서
신바닥에 묻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아 두둘겨 털었다고 하여 두둘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병인박해 이후 교우들의 애절한 사연을 지닌 한서린 이름이 되었다.
포졸들은 근방의 용인,안성,원삼,가칠암 등에서 숨어살던 교인들을 잡아 오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곤 했다.그러니까 이곳 주막들은 포졸이나 수하들의 집결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모여든 포졸들은 잡혀온 교인들에게 '돈을내라.' '이제 너희들은 저 달거리 잔등만 넘으면 죽는다.
돈을내면 풀어주마.' 하면서 두들겨 팼던 것이다.
뒤쫓아온 가족들은 그것을 보고 원통함에 땅을 두들기며 울고, 이래저래 이곳은 두드리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 장미꽃 한송이를 뜻하는 커다란 돌 묵주알이 아름다운 장미꽃 무리에 싸여있다.
죽산 순교성지가 순교를 향한 잊은터와 두둘기로 알려지게 됨은 순교자들의 주님을 향한
'아픈사랑'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는 무관한 듯 꽃들의 향연이 벌어진 성모동산
이처럼 주님의 아픈 사랑의 형장인 죽산 순교성지는 오늘을 사는 교우들에게 십자가의 어리석음
을 깨닫게 해주며, 후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리라고 믿는다.
위 글의 내용은 죽산성지에서 배포하는 유인물을 참조한 것입니다.
죽산성지의 소성당의 토속적인 제대를 보니 이곳을 일구신 신부님의 정성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
하다.
성모님과 아기예수님을 한국적으로 표현하신 신부님의 독창성에 박수를 보낸다.
장미꽃 터널을 지나면 바로 성모동산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의 비통한 마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