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의 총 본산인 안성의 바우덕이 축제
TV 사극 '왕의남자'에 출연하여 드라마를 빛낸 남사당패는
줄타기,풍물놀이,살판(땅재주),탈놀음,덜미(인형극),버나놀이(접시돌리기) 등
의 공연을 행사기간 내내 펼쳤다.
극 중 공길이 역으로 유명해진 안성의 남사당패는 조선후기에 바우덕이라는
걸출한 인물로 인해 화려한 꽃을 피웠다고 한다.
몇년을 벼르다가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아간 안성의 행사장.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외줄타기뿐 아니라 여러 공연 프로그램으로
찾는이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행사장으로 쓰이는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길가의 벚나무 가로수가 곱게 물들어 가는것이 이제 가을도 그 가운데에 와 있나보다.
행사장의 대문
남사당은 조선 후기에 장터와 마을을 돌며 줄타기,인형극,풍물놀이 등의 공연을 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공연 집단이라고 한다.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한다.
'바우덕이'(1848~1870)는 집이 가난하여 5세의 어린나이에 안성 남사당패에 맡겨졌는데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을 인정받아 15세의 나이에 만장일치로 꼭두쇠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여인이 있어 기념촬영을 해본다>
이후 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졌고, 고종2년(1865) 흥성 대원군으로부터 경복궁 중건사업의 위문공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상관 정 3품의 관직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비천한 남사당문화를 대중공연문화로 발전시키고 백성들의 억눌린 한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다가 힘든 유랑생활로 폐병에 걸려 23세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 피부색이 다른 여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공연단의 일원이었다.>
바우덕이는 비천한 남사당의 신분을 뛰어넘어 조선을 빛낸 여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연예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추억의 떡메에 어깨힘도 점검해보고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난다.
장터마당에서는 살판(땅재주)꾼들의 익살에 연신 웃음바다
'펑'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혼비백산을 하게하는 추억의 튀밥도 맛보고.
거리에는 우리를 추억속으로 이끄는 호롱과 등잔도 즐비하다.
60년대에 어머니 손을잡고 장터에 가면 보통 이런 풍경이었던 기억이 난다.
<안성에 있는 동아방송 대학생들의 퍼레이드 중 각설이역의 여학생들이 익살스런 표정을 선사한다.>
<행사장 입구에 세워진 '바우덕이'상>
중학교 2학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학생의 줄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아직 어린 나이탓에 추임새는 다소 서툴지만 잘 연마하면 바우덕이의 뒤를 이을만한 인재로 성장할 듯 하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관객을 즐겁게 하는 여학생
구경나오신 어르신은 신이나서 연신 춤을 추신다.
어린학생의 기특한 재주에 어른들은 선뜻 만원쩌리 지폐를 줄위의 여학생에게 올려주는
흐뭇한 광경도 여러본 보인다.
땅위의 악사들도 덩달아 신이난다.
한쪽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유치원생들의 풍물놀이가 흥을 돋구고
이어서 풍물놀이 전국 본선에 오른 교사팀들의 신명나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장터 한가운데 마련된 줄타기 마당에는 방송에서 낯이익은 으뜸쇠의 줄타기 공연이 한창이다.
추억의 노래를 섹소폰으로 연주하는 안성 웰빙주 가게 주인의 연주솜씨에 웰빙주 셋트를 선뜻 사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