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남전리 남이장군묘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남이장군묘>
날잡아 나서기만 하면 비가 오락가락 하는 요즘이다. 어떤이는 요긴한 하루 휴일에 꿀맛같은 잠이나 자라 하지만 천성이 온 산천을 싸돌아 다녀야만 하는 나는 오늘도 어딘가로 떠난다. 요즘 부쩍 많아진 나들이가 옛것을 찾아가는 일.오늘은 비운의 천재무인 남이장군을 만나러 떠나본다.
<길가에 비석 하나만 서있고 방향도,거리도 표시되지 않은 안내석이다.>
오늘 찾아가는 남이장군묘도 보통 정성으로는 찾다가 포기하기 딱 알맞겠다.
"조선 세조 때의 무관인 남이장군 묘는 비봉면 사무소가 있는 양로리에서 북서쪽 3km 쯤의 야산에 있으며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는 상석, 왼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에는 석인과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명이야 이렇지만 한번 이 설명대로 찾아 보시겠는가?
내가 남양에 근무할 때 이 길을 수도없이 다녔지만 찾다가 포기를 했고, 오늘도 비까지 추적거리니 망설임 끝에 오기로 찾아본 것이다.
서울이나 수원에서 진입시
비봉에서 안산 본오동쪽으로 난 2차선 길로 들어서 3분쯤 가다가 왼쪽 수로의 배수갑문에서 좌회전을 한다. 논가운데로 난 반듯한 도로 끝에 도정공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우회전, 유포리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한다. 그 길로 계속 가다가 자그마한 다리 건너 우측에 "남이장군묘" 비석안내문이 보이면 표지석에서 바로 우회전을 한다.이곳에서 좁은 마을길을 500미터쯤 올라가면 남이장군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헌데 이곳은 주차할 곳이 없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아래 사진의 폐가가 보이면 그곳에 주차하는 것이 그나마 수고를 줄이는 방법일 것이다. 진입로는 아예 없으며,좁다란 농촌 마을길을 이용하는데 주차공간이라고는 전혀없다. 혹여 가다가 앞에 다른 차라도 만나면 낭패가 아닐 수 없겠다.
우측에 반사경이 있고, 좌측에 이 건물이 보이면 이곳에 주차를 하면 된다.
그나마 주차를 했으니 이제 남이장군을 만나러 가보자.
남이장군묘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왼쪽길을 보면
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듯한 낙엽들의 잔치이다.
산짐승이라도 만날듯한 짧은 숲길을 지나니 번듯하게 조성된 묘가 나타난다. 이정도로 조성할 것 같으면 진입로라도 내주시지 원..아니면 표지판이라도 보강을 해주시던가..
<무인묘에 특이하게도 문인상을 배치한 모습>
남이장군에 대해 설명된 글을 보자면 이렇다. 헌데 왜 장군의 묘가 이곳에 있는지는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군의 섬은 이름하여 '남이섬'이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는데 남이섬의 묘는 전해 내려오는 허묘라고 한다.즉,화성의 묘가 진묘라는 이야기이다.
남이 장군은 세조 3년(1457),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여진족 건주위 부족을 정벌할 때에도 선봉에 나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적개공신이 되고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예종 원년(1468) 유자광의 무고로 역모를 도모한다 하여 처형되었다. 순조 18년(1818)에 관직이 복귀되었고 충무의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2단으로 쌓인 석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 상석이 위치하고 좌측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손자로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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