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갈수록 내게 매력을 주는 곳이다.
개발의 마수가 이곳이라고 비켜 갈리는 만무하지만 그런곳은 애써 외면을 하며, 보고싶은 곳만 다녀온다면 역사적인 유물,유적과 상쾌한 자연까지 만끽하고 올 수 있는 곳이다. 하여 오늘도 친한 교우와 강화도로 달려본다.
강화도에는 53개의 돈대가 있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곳은 3개의 돈대가 몰려 있으며 개화기에 일어난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광성보이다. 이곳에는 3개의 돈대와 보기드문 포대까지 있어서 강화도에서도 보기 힘든 유적지라 하겠다.
11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광성보에 들어선다.
광성보의 정문 역할을 하는 안해루(按海樓) : 바다를 누른다는 뜻으로 바다를 평안히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안해루 바로 옆에는 광성보의 수문장인 광성돈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사진은 광성돈대의 정문을 들어가며 잡아 본 풍경이다.
안해루와 광성돈대에 인사를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광성보 안으로 들어가본다.
피비린내 나는 신미양요의 격전을 기억이나 하는지 오늘도 아름다운 산책길이 반기고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걸으면 이내 쌍충비각이라는 유적과 만난다.
아래는 안내문을 그대로 배껴본다.
쌍충비(雙忠碑)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1871년 신미양요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순수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의 순절비인데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5Cm 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 되었다.고종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일곱기의 묘가 보이는데 신미양요때 순절한 군사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신미순의총
소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이곳은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 해군과 격전을 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근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을 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간할 수 없어서 7기의 분묘에 합장을 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아름다운 산책로를 따라가면 위와같은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것은 신미양요때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사진을 보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사진 포인트에서 찍은 손돌목 돈대. 손돌목돈대는 주위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해 있으며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또다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내려간다.
용두돈대와 광성포대를 가는 길이 나눠지는 곳에는 쉬어가기 좋은 휴식공간이 있다. 전에 방문 했을 때 초등학생과 교사가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오늘 배운것을 문제로 풀어보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의 이해도가 높아서 감탄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용두돈대가 보인다. 용두돈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빠르고 또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년, 1627년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여 손돌을 죽으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 하였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이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손돌바람,손돌추위라고 한다.
해안가 절벽위의 용두돈대
용두돈대 가는 길
용두돈대에서 본 광성포대.
용두돈대에는 1977년에 유적지 정화사업을 한 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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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포대를 둘러보고 쌍충비각 옆의 휴식공간에서 잠시 쉬어간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로 53개의 돈대가 있다.
돈대는 장독대의 대를 나타내는 군대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서너개의 돈대가 모여 보나 진을 이루는데 보와 진은 동등한 위치를 갖는 단위이다. 보와 진은 만호나 첨사가 지휘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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