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봉산(해발 362m)
소재지: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
산행인원:7명
산행경로 : 중2리 마을회관-헬기장-아흔아홉고개-정상-청려수련원 우측능선-청려수련원입구-중2리 마을회관
무봉산이라는 이름은 많지만 화성에 살면서 이곳에도 무봉산이라는 산이 있다는건 처음 듣는다.
하지만 워낙 산이 귀한 땅인지라 화성에서 두번째 높은 산이라고 한다.
건달산이 367미터이고, 무봉산이 362미터이니 5미터가 낮은 셈이다.
내일부터는 장마기 북상하리라는 예보를 들으며 마을 아우들과 이 산에 올라보았다.
산행경로는 사진의 산행경로에서 가장 외곽선을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다.
요즘 점점 기력이 없어짐을 느끼며 오늘도 초입부터 힘들게 오른다.
중이리 마을회관 옆 녹음이 우거진 산로를 따라 일행이 등산을 시작하고 있다.
칡잎사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잠자리도 평화롭다.
첫번째 경사로가 끝나자 나타나는 평지길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두번째 경사로를 오르다가 만나는 쉼터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이 산에는 여러개의 봉우리가 있지만 거의 이름이 없었다.
산행후에 혹시나 하고 지도를 뒤져보았지만 인터넷 지도에서도 역시 봉우리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첫번째 만나는 정자가 있는 높은 봉우리는 이름이 있을법도 한데..
이따끔씩 보이는 이정표가 반갑지만 거리표시가 없어서 답답하다.
하지만 울창한 굴참나무가 훌륭한 그늘막이가 되어주어 고마운 산이다.
인적이 드문 이 산에는 청정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초들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개옻나무와 관중, 싸리나무,애기나리 등이 어루러져 자연화단이 되어준다.
정상부에 도착하기 전에 만난 봉우리의 정자에서 일행의 간식을 꺼내보니 온통 과일잔치이다.
표지석 하나없느 정상에서
돌무더기 옆에 서있는 경고표지판으로 정상부임을 알 수 있을뿐..
정상석이 없는 정상부, 일체화 되지 않은 표지판 등의 시설물들로 미루어 보아
화성시에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땅의 넓이에 비해 변변한 산이 없는 화성시에서 그나마 산다운 산을 만났는데 역시나 그들의 불감증만 보게 되고..
정상부 능선의 산로는 이처럼 아늑한 평화의 길이다.
우연히 발견한 곤충인데 마디모양의 위장술을 쓰는 곤충이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행인의 발길에 밟혔는지 다리도 하나 떨어져 있다.
동행하던 아우가 나뭇가지에 올려줬는데 잘 살지 모르겠다.
일행이 장난스럽게 나무에 꽂아놓은 버섯.
지도에서 보니 기흥CC라고 되어있는 골프장 / 하신길에 왼쪽으로 보인다.
출발점인 중2리 마을회관으로 가기위해 능선을 내려오자 만나게 되는 길.
이 길은 청려수련원 진입로이다. 이 진입로 아래쪽으로 10분쯤 내려오면 출발점인 중2리 마을회관으로
원점 회귀한다.
[무봉산 만의사]
마을회관에 주차했던 차를타고 다시 만의사로 향했다.
창건한지는 오래 됐다는데 가람을 보니 거의가 최근에 지어진 집들이다.
하지만 주지스님의 능력인지 건물들이 웅장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 또 하나의 명소가 될법하다.
저쪽 건물이 부처님 나라라는 건물인데 엄청난 규모이다.
천불상은 모신 천불전
요즘엔 화재의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인지 전기초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이곳이 부처님나라의 내부 모습이다.
엄청난 규모의 한옥인 셈이다.
산행후에 식사를 한 묵밥집의 묵요리.(도토리빈대떡)
북밥집 정원의 모습
무봉산 만의사(네이버백과사전에서 옮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어 당시에는 만의사(萬義寺)라 하였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 정길(貞吉)과 현묵(玄默)이 중창하였고, 1312년(충선왕 4) 당시 천태종 진구사(珍丘寺) 주지였던 혼기(混其)가 주지로 부임한 뒤 크게 중창하고 법화도량(法華道場)을 열어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선(義璇)이 사세를 더욱 키웠으며, 충혜왕 때의 주지 묘혜(妙慧)는 요원(了圓)이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을 간행할 때 비용을 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때부터는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주지를 교대로 맡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 절이 사전(寺田)과 노비를 많이 소유하여 부유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두 종파간 다툼이 심해지자 노비를 모두 수원부(水原府)에 속하게 하고 절은 천태종이 관할하게 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공이 컸던 신조(神照)가 주지로 온 뒤부터 다시 노비를 받았으며, 사전 70결도 받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에 공이 큰 까닭에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도 비교적 사세를 크게 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이 이 절에서 수도한 바 있고, 사명대사 유정(惟政)의 제자 선화(禪華)도 이곳에 머물다가 1644년(인조 22)에 입적하였다. 1669년(현종 10) 절터가 송시열(宋時烈)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萬儀寺)로 바꾸었다. 1796년(정조 20)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이 절의 동종을 가져다가 팔달문(八達門)에 옮겨 달았으며, 1894년(고종 31)에는 지장전이 무너져 내려 안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십대왕상, 판관상, 사자상, 인왕상 2구를 용주사로 옮긴 바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산신각·범종각·봉서루가 있고, 4동의 요사채가 있다. 유물은 1791년(정조 15) 제작된 지장보살 탱화가 유명하다. 한편 동탄면 신리의 옛 절터에는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원각사(圓覺寺)가 들어서 있다.
'대청 산행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여름 청계산에서 흘린 땀(2010.7.31.토) (0) | 2010.07.31 |
---|---|
무더위와 습기속의 광교산행(2010.7.24.토) (0) | 2010.07.24 |
의왕 모락산 무중(霧中)산행(2010.7.2.토) (0) | 2010.07.05 |
건달산에서 본 화성의 상처(2010.6.2) (0) | 2010.06.06 |
청계산 그늘산행(2010.6.5.토) (0) | 2010.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