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지순례

숨어든 산골에 핀 신앙의 꽃동네-용인 한덕골 성지(2012.11.24)

대청마루ㄷ 2012. 11. 25. 13:40

 

용인 한덕골 성지

모진 박해를 피해 모인 교우들의 보금자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

성지의 늦가을은 휑한 바람만이 그 옛날에 꽃피웠던 신앙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신앙이 무엇이길래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 과연 이시대에 그와 같은 시련이 닥친다면 목숨으로 신앙을 지킬 교우가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곳이다.

이곳 한덕골은 지금이야 자동차로 달려 손쉽게 찾아갈 수 있지만 모든 이동을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던 그 당시에는 감히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하기 힘든 곳이다. 이제 세상이 좋아져 골짜기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싶어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산간벽지라는 개념이 무너졌지만..

한덕골은 네비게이션으로도 검색이 안되는 골짜기에 있다.

용인 천리에서 신원CC로 가다보면 이제 베드타운이 되어있는 아파트촌을 거쳐 용덕저수지를 지나가게 되는데 신원골프장 입구까지는 여늬 성지를 가는것처럼 손쉬운 도로이다.

인터넷 지도를 보면 평지와 산의 구분이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한덕골 성지를 지도상에서 보면 신원골프장의 어느 한 경계에 들어있어서 찾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실상 가서 보면 골프장과 상관이 없는 곳이다.

차량의 통행도 드문 소로이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한다. 골프장 입구를 지나 왼쪽에 마을을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들길을 조심스럽게 가다보면 우측에 한덕골 성지를 알리는 안내문판이 있다. 차는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이 길가에 세우고 올라가도 된다.

 

 

 

 

 

 

 

 

<가톨릭 굿뉴스 기사 인용>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 4리(龍仁市 二東面 墨4里)에 위치한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이곳으로 피난 와서,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 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며, 그 중 교우촌은 윗마을인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金澤鉉, 1766-1830)과 숙부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의 한덕골 피난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 와서 중백부(仲伯父 崔榮謙)와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최 신부는 그 이후에도 가끔 이곳에 들러 성사를 주곤 하였다.
2010년 5월 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에서 설치한 파티마의 성모상.이곳 한덕골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5-1839 성인을 비롯하여, 김 시몬(1870년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세) 등이 있다.
신앙 때문에 고향과 가산을 다 버리고 이곳에 피난 와서,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신자 본분을 굳게 지키며 사셨던 신앙 선조들의 기도소리가 지금도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려오는 듯하다.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각별한 열정을 지닌 인천교구의 김진용 씨는 한덕골을 발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한덕골 사적지 부지 또한 손수 매입하여 수원교구에 기증하였다. 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은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그리고 양 옆으로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상을 설치했고, 2010년 5월에는 파티마의 성모상을 설치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한덕골 사적지 안내판, 내용 일부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