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백제의 고성인 공산성은 그동안 가슴에만 기직해온 그리움이었다.
공주를 지날때마다 먼 거리로만 스치고 지나다니면서 언젠가는 꼭 가 보아야 할 그리움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곳.
오늘 기꺼이 동행을 해주신 동료 교우께 감사하며 추억이 식기전에 현장을 갈무리를 해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 위용을 자랑하며 객을 맞는 금서루(錦西樓)
금서루는 공산성의 서문이다.
헌데 문의 왼쪽으로 난 차량 통행로가 옥의 티이다.
천정을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금서루의 왼쪽(북측)벽
금서루에서 본 민가와 성벽
금서루에서 남쪽으로 오르다가 뒤돌아 본 풍경
금서루에서 본 전망대
성벽을 따라 돌다가 본 남벽
가을은 이미 저물어 겨울로 가고있는 수목들
수목들 저 위에 정자가 있어서 다가가본다
그 정자 아래 설명을 붙여 탐방객의 이해를 돕고있다.
올라가보니 평상적인 일반 정자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서 내려와 있었던 잠시의 피난을 기념하려고 지었다는 그 당시의 아부성에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커다란 돌비석까지 만들어 기념을 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나 지금 북한의 상황이나 비숫한 듯..
병자호란을 맞아 오랑캐에 쫓겨서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결국엔 그들에게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치욕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 일어난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까지 피난을 온 무능한 임금에게 정자까지 지어서 바친 아부성..
하지만 근대에 와서 축조된 건물이라 온전히 남아 우리에게 역사를 증명하고 있음이 다행이다.
쌍수정 아래 평지에는 당시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넓다란 평지가 있는데 복원과정에서 발견 되었다는 연지가 있었고 한다.
헌데 이 연지를 목원하면서 윗부분을 온통 시멘트로 발라놓아 현실성이 떨어지는게 흠이다.
멀리 본 연지
이 우물은 높은곳에 있어서 물이 나올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온통 노비들이 물을 길어서 날라다 채웠다는 말인지?
성은 온통 낙엽의 잔치이다.
저 앞에 성의 남문인 진남루가 보인다.
진남루(鎭南樓)에서 본 쌍수교(䨇樹橋)
성곽을 도는 내내 우리를 따라 다니는 삼족오 깃발
헌데 이 삼족오는 동서남북이 바뀜에 따라 다릿수도 다르고 모양도 달라 보인다.
지금 이 삼족오는 이족오인가?
동쪽으로 오르다 뒤돌아 본 진남루
성벽을 따라 힘들게 오르다 보니 동문인 동문루(東門樓)가 나타난다.
동문루
동문루를 지나 정상으로 가는길은 경사가 급한 토성길이다.
헌데 마치 등산로 같은 모양으로 복원을 해놓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광복루(光復樓) 라는 곳에서 본 북쪽
비단결 같은 금강이 보인다.
光復樓 2층에서 본 금강과 공주 시가지
광복루에서 이어진 성곽은 금강을 따라도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북쪽의 삼족오는 사족오가 되어있다.
공산성을 휘감아 도는 아름다운 금강
광복루에서 북문으로 난 성곽길
이 구간은 급경사이므로 눈이라도 내리면 주의가 요구되는 곳이다.
삼국이 다툴때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었지만 평화로운 시대에는 시인묵객들의 요람이었을 법한 가경(佳景)들이 이어진다.
이곳의 삼족오는 사족오에 거북이 등을 하고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가다가 보이는 연못
이곳이 바로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라는 건물로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누각을 세워 방어와 잔치를 하는 기능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 영조때 건설된 곳으로 연지에서 비밀통로를 통해 성 안으로 통과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연지 윗쪽에 있는 영은사는 조선 세조때 지어진 군사적 목적이 큰 사찰이다.
북문쪽으로 오르다 뒤돌아본 만하루
겨울철에 누에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일제시대의 잠종냉장고
이 성곽은 순례 내내 아름드리 느티나무 노거수가 따라다녀 기분이 좋다.
노거수와 어우러진 강물 저 건녀편의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롭다.
언뜻 보아도 수백년은 됐음직하 느티나무 노거수들
나이 지긋한 느티나무와 거북이 갑옥을 등에진 사족오
아무곳을 보아도 그림같은 정경의 공산성
돌다보니 어느새 전망대에 당도하였다.
전망대 옆의 바위에서 본 금강
전망대에서 본 왼쪽의 공북루(拱北樓)와 공사를 하느라 터를 파놓은 백제민속마을 예정지
전망대에서 본 동쪽풍경
북쪽풍경
서쪽풍경
남쪽풍경
이제 다시 출발점이었던 금서루를 통과하여 주차장으로 가는 길
역대 이곳을 거쳐간 관리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둔 비석군
공산성은 60년 남짓한 웅진백제의 왕성이다.
이 산성이 웅진이라는 도성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진행된 큰 나라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또 다시 이곳을 버리고 이 금강 물줄기를 따라 100리를 내려간 곳으로 도성을 옮겼으니 그곳이 바로 사비(부여)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220년간 존속 되다가 당나라라는 외국군을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킨 신라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220년간 부여를 지키던 부소산성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포스팅 했던 나의 글을 참고하시면 된다.
관련 포스팅 보기 : 부여여행-부소산성과 낙화암의 전설을 따라(2011.12.14)
http://blog.daum.net/sanuri/1593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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