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사람과 동행하느냐?"라는 걸 절실히 깨달은 날이었다.
일년에 한번 있는 제사를 모신 이튿날 형제들과 떠난 광주와 담양의 경계에 있는 광주호반의 가사문학관.
문학관을 들어가기 전 광주호반에 있는 생태공원이 손짓을 하고,식영정이나 환벽당, 그리고 취가정 등 둘러봐야 할 곳이 너무 많은 곳이었다.
우선 일행의 나이를 생각해서 생태공원에 가서 좀 쉬었다 가자고 들어갔더니 뭐 볼게 있다고 이런곳에 오느냐고 일차민원.
나와서 환벽당에 가자고 하니 또 뭐 볼것이 있다고 힘들게 그런곳엘 올라가냐고 이차민원.
하여 동의하는 몇이서 환벽당과 취가정을 들렀다 오니 가사문학관도 싫다, 식영정도 싫다…
결국은 길에 기름만 뿌리며 다닌 노동이 되어 버렸다.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운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큰누나가 추천하는 전북 임실의 청웅이라는 곳에 있는 다슬기국 집에서 사먹은 다슬기 국이 그 중 백미라고 하는 허망한 여행이었다.
가장 값진 여행은 사랑하는 이와의 여행일테고, 그다음은 마음과 뜻이 통하는 이들과의 여행일게다.
눈앞에 아무리 금은보화가 쌓여 있은들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노동일 뿐이니..
어쨌거나 남들에게는 그저 시골의 허름한 옛 정각으로만 보였을 그 환벽당과 취가정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어쩌면 더 잘된 것이 소쇄원,식영정과 가사문학관,광주호 생태공원 등 시간을 가지고 만나봐야 할 소중한 공간들을 남겨두고 온 것이다.
가치를 모르는 이들과 기분 안좋게 돌아보는 것보다 가치를 아는 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여행이 좋지 않겠는가?
광주호 생태공원 정문쯤에 이르니 저쪽에 몸으로 연륜을 대변하는 노거수들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니 인터넷을 통해 반가움이 되어버린 “충효동 왕버들”이 백발 성성한 노인네가 귀여운 손주 바라보듯 여유로운 미소로 오가는 이들을 굽어보고 있다.
충효동 왕버들
정려비각 앞에서 옛날의 역사가 되어있는 세그루의 왕버들
꼬이고 뒤틀려 있는 모습에서 우리의 역사를 유추해본다.
충효동 왕버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등지의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버드나무에 비해 키가 크고 잎도 넓기 때문에 왕버들이라 불리며, 잎이 새로 나올 때는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충효동의 왕버들은 광주호 동쪽 제방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가에서 자라고 있다.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1그루, 버드나무(매화나무의 오기로 생각됨)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 정자가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왕버들도 그 때 심어졌던 것으로 추측 되어진다. 가장 큰 나무의 높이가 12m, 둘레가 6.3m이고, 작은 나무의 높이가 9m, 둘레가 6.25m로 세 그루가 고른 크기로 자라고 있다.(옮긴 글)
왕버들 바로 뒤에는 정려각이라는 자그마한 비각이 있는데 이곳이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김덕령 장군의 태생지임을 알게 해준다.
충료동 정려비각
충효동 정려비각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비는 정조 13년(1789)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옮긴 글)
환벽당
왕버들을 보고 가던길을 되돌아와 우측으로 잠시 들어가니 정문인지 후문인지 분간이 안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은 바로 계단으로 이어져 높다란 곳에 지어진 한옥에 이른다.
이 건물은 경사면에 지어져 마당이 없고 마당역할을 하는 경사면 아래에 연못이 있다.
정면 2칸,측면 2칸의 환벽당
환벽당
광주호 상류 창계천의 충효동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자로, 조선시대 때 나주목사 김윤제가 고향으로 돌아와 건물을 세우고, 교육에 힘쓰던 곳이다. 전에는 ‘벽간당’이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머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가 걸려 있으며,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로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윤제와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용소에서 한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데려다가 제자로 삼고 외손녀와 결혼시켰는데, 그가 훗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고 한다.(옮긴 글)
취가정
취가정
취가정(醉歌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이다.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된다.(옮긴 글)
아래는 김덕령의 제자였던 권필의 꿈에 나타나 김덕령 장군이 억울한 죽음을 탄식하여 불렀다는 시를 번역해 놓은 글이다.
醉時歌 (권필 지음/ 권순열 번역)
醉時歌여 - 취시가여
此曲無人聞이라 - 이 곡을 듣는 이 없네.
我不要醉花月이요 - 나는 꽃과 달에 취하고 싶지 않고
我不要樹功勳이라 - 나는 공훈도 세우고 싶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이요 -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이라 -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네.
醉時歌無人知라 - 취시가를 알아주는 사람 없는지라
我心只願長劍奉明君이라 - 내 마음 다만 장검들고 명군 받들기를 원하네
우리 문학의 한획을 긋는 가사문학의 향기를 느끼고자 갔던 그곳에서 가사문학의 근처에도 못갔지만 송강 정철 선생의 어릴적 배움터였던 환벽당을 접한 것만 해도 시작은 하였으니 그리 섭섭하지는 않다.
가까운 날에 따로 시간을 내어 옛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반드시 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 아쉬운 여로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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