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7대 불가사의로는 다음과 같다.
① 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② 중국의 만리장성
③ 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④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⑤ 이집트의 피라미드
⑥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⑦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스탄불의 성(聖)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km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영국의 거석기념물(巨石紀念物, 스톤헨지)
로마의 원형극장(콜로세움)
로마에 있는 거대한 원형경기장. |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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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BC 2550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7대 불가사의 가운데 가장 크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피라미드란 일반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 사업은 돌을 케내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땟목에 올려 강을 건넜고 역시 강기슭에 도착한 석재를 건설현장 까지 운반하였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이상이 전통적인 학계의 의견이다.
그러나 위 학설에 대한 많은 부정과 비판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건조법으로 피라미드 건설을 설명할 때 다른 피라미드는 대개 설명이 가능하나 그레이트 피라미드(쿠푸왕)의 경우에는 도저히 불가하다. 그레이엄 햄콕은 그의 저서 '신의 지문'에서 위의 전통적 학설에 이의를 가하며 많은 부분을 부정한다.
사실, '그레이트 피라미드가 쿠푸왕의 무덤이 맞는가?'라는 의문부터 시작한다.
즉, 그레이트 피라미드에서는 그 누구의 미이라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어느 문헌에도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없다.
증축 및 보수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연대적으로 볼 때 다른 피라미드는 그레이트 피라미드의 모방작에 불과하다는 설 또한 있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미이라의 저주나 계단의 수가 세계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는 식의 많은 이야기들은 결코 간과할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 속에서 피라미드는 영화의 가장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개봉작 '머미'나 '스타게이트'등은 이러한 심사를 많이 반영하는 것이다.
어쨌든 역사상 최고의 미스테리, 미스테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그 크기, 설계의 치밀함, 주변환경과 조화되어 있고 천문학적 지식을 집대성하고 있는 피라미드는 심오한 우주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건설되어졌고,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린 엄청난 무게를 4,800년의 기간동안 견디며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斜塔)
(영)Leaning Tower of Pisa.
피사에 있는 중세 건축물. |
기단이 가라앉아 수직면에서 5.2m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피사의 성당 복합체 가운데 3번째이며 마지막인 구조물로 1174년에 착공된 이 종탑은 56m 높이로 설계되어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기초부가 무른 땅속으로 기울어지게 가라앉는 것을 발견한 때는 이미 전체 8층 중 3층까지 완공되어 있었다. 책임 기술자였던 본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4세기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기초에 액상 시멘트를 주입해 보강했음에도 20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붕괴의 위험이 있어 사탑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이 구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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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
가장 유명한 고대의 등대로 기술적인 위업이며 이후 세워진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웠고 높이가 135m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등대는 3단식으로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며 모두 약간 안쪽으로 쏠리게 지어졌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옥탑에서 밤에 불을 밝혔다.
이 등대 위에는 거대한 조상(彫像)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를 태양신 헬리오스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등대는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최초의 목록은 그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꼽고 있음). 중세 아랍인들은 꼭대기 등대를 작은 모스크로 바꾸었다. 이 등대는 12세기 이후에 무너졌으며 1477년경 맘루크 술탄 카이트 베이는 그 잔해를 이용해 요새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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