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 여행기록

천진난만한 부처님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상

대청마루ㄷ 2008. 12. 11. 00:07

 

국보  제84호

 

10년만의 재회.

서산의 가야산행을 종주코스로 잡는다면 산행의 날머리가 되는곳에 백제 800년의 미소가 있다.

언뜻보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오지의 산 기슭.

주위에 유명한 사찰이 있는것도 아니고 접근성도 그리 좋지 않은 곳이다.

헌데 백제의 석공은 왜 이런 오지에 불후의 명작을 남겼을까?

 

혹시 이 석공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재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10년 전의 방문에서나 이번 탐방에서도 여전히 혼자만의 의문으로 남겨두게 되었다.

 

 

전에 왔을때는 징검다리를 건넜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가보니 양질의 목재로 다리를 놓고 산을 오르는 계단도

깔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이다. 불상 아래에는 관리소까지 두어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고있는 지자체의 성의가 보

인다.

 

 

불상을 보호한답시고 어줍짢게 불상을 덮어버려서 눈쌀을 찌푸리게 했던 보호각도 치워져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어서 반가웠다.

 

 

원래 이 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태양이 떠오을 때 빛의 각도에 따라 생기는 음영으로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데 우리가 간 시각은 그 반대로 태양이 지는 시각이었으니 그 가치는 반감 되었겠지만 본연의 미소를

느끼기에 그리 부족하지는 않았다.

 

 

세월의 풍상에, 그리고 온갖 인간군상들의 욕심에의하여 팔이 떨어지고 이마가 패었더라도 그 천진한 미소를

지울 수는 없다.

도대체 어떤 무아지경의 세계에 빠져들었기에 부처님을 저리도 천진한 미소로 재현 시킬 수 있었을까?

 

[보충설명]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

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

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

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

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

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