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당시 우리또래의 아이들 중 초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아이들이 꽤나 있었다.
가정의 경제적 사정도 있었고,여러가지 피치못할 사정도 있었겠지만 등하교길의 어려움도 무시하지 못할 중도탈락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부모님의 무지에서 비롯된 교육열의 미진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가지 사정상 남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그나마 입학식날 부모님의 손을잡고 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친구들 입학하러 가는길에 따라가서 입학식을 치를 정도였으니까.
사방 둘러봐도 첩첩이 둘러쳐진 병풍같은 산중에 우리마을에서 이웃마을을 건너다 보기라도 할려면 반드시 동구밖을 나와 산모퉁이를 돌아야 이웃 마을을 볼수 있는 곳,이 작은터에 400여년 전 처음 터를 잡은이래 씨족이 대부분인 1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1천여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게 된 마을.
우리마을에서 학교에 가려면 꼭 건너야 하는 냇물이 있었다.
폭이 15미터 정도 되는 실개천이지만 여름 장마비에 물이라도 불어나면 어린 우리들의 학교길에 발목을 붙잡곤 하는 골치아픈 개천이었다.
징검다리로 놓아둔 돌맹이를 들추면 가재가 잡힐정도로 맑고 작은 개울인데 물이 불어나면 어른들도 건너기 힘든 무서운 하천으로 변하곤 했던 것이다.
우리가 4학년 되던 해 봄에 다리(?)가 개통되었다.
사실,말이 다리지 논에 물을 대기위한 수로 였는데 길다란 통나무에 홈을파서 대어놓았던것을 시멘트로 바꾸어 놓았을뿐이다.
폭50Cm정도에 길이 15m정도의 하천 횡단 수로에 뚜껑을 덮어서 "사랑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개통을 하였다.
수로건 다리건 학생들의 편의를 생각한 시설물이어서인지 교장선생님까지 참석하신 큰 행사로 치루어진 개통식,이 다리의 개통으로 우리마을 아이들은 한가지의 낙을 잃는 고통도 뒤따랐는데,장대비가 퍼붓는 여름날은 학교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우리마을 아이들은 물을 못건너 학교에 못갔다고 이장님이 확인만 해주시면 결석처리가 안되던 것을 이제부터 안통하게 된것이다.
아침이면 마을앞 공터에 책보를 메고 든 아이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4열 종대로 늘어서서 애향단장의 구령에 맞추어 힘차게 행군을 한다.그때 의례 나오는 행진곡은 "공산당은 싫어요. "
원수의 총칼앞에 피를흘리며- 마지막 주고간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울고넘는 운두령고개- 새무덤 오솔길에 산새가 운다-
이노래가 나오면서부터 이노래를 안부르고 학교에 간 날은 거의 없었다.
보리밥 노래도 많이 불렀던것 같다.
먹고사는 주식이 꽁당 보리밥인데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세뇌 시켜야만 했던 절박한 농촌의 사정.
하지만 어린 우리들이 그 어려운 사정을 어찌 알았으랴?
새벽 이슬을 촉촉히 머금은 학교길을 가자면 아른한 봄볕을 받아 싱그럽게 올라오는 찔레순이 탐스럽다.
통통한 순을꺾어 껍질 벗겨내고 물기가 촉촉한 속살을 베어먹으면 입안에도는 풀향기와 단맛에 과자보다 더한맛을 느끼곤했다.
학교길 십리길은 부지런히 걸어야했다.
학교 바로앞에 있는 마을아이들을 항상 부러워하면서 다닌 초등학교.
하교길은 등교길보다 훨씬 즐거웠다.
집에 일찍가면 일을 해야되기 때문에 항상 같은마을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같은 시각에 집에들어가곤 하였다.
이런 사정을 선생님이 아시고 학교에서 노는것을 제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놀이는 주로 학교밖에서 이루어졌다.
학교앞 범순이네 가게에서 1원을주고 독사탕(하얀색의 조그마한 사탕으로 진한 단맛이나며 중앙부에 콩같은것이 들어있는데 돌처럼 단단하여 독사탕이라고 부른다.)한개와 도화지 한장을 사면 먹거리와 문구까지 한꺼번에 장만을 하는 효과가 난다.
그 사탕을 입속에넣고 가능한 한 천천히 녹이려고 침을 조금씩만 묻혀가면서 두마을을 지나온다.
그러면 드디어 우리구역- 우리구역에 들어오면 구부나무라는 곳이 있다. 길옆의 산에 이상한 모양으로 굽어 올라간 거목이 있었는데 우리가 학교다닐 즈음에는 늙어 죽었는지 잎사귀 다떨어진 고사목으로 남아있었지만 지명은 그대로 구부나무였다.
그곳에 처음 선배들이 지어놓은 원두막 모양의 아지트가 있었는데 제법 집 모양을 갖춘 오리나무 이층집이었다.
이곳에서 나른한 오후 햇살을 나뭇그늘로 가린 채 한숨을 자고나면 약속이나 한것처럼 다시 일어나 마을로 향한다.
집에서 담아온 도시락은 2교시만 지나면 다 비워지고 점심시간에 배급되는 옥수수죽도 한입에 다 마셔 버렸지만 영양분없이 배만 채우게 만든 음식들은 항상 허기지기만 했다.
양은으로 만든 도시락은 형식적으로 칠해놓은 노란색의 도금이 벗겨지고나면 책이란 책 모두를 회색으로 칠하고,김치국물에 찌들은 책들은 벌건색의 모양이 보기에도 사납거니와 온갖냄새에 찌들어 교실에 항상 역겨운냄새를 풍겨대었다.
항상 어려운 선생님앞에서 눈치없는 방귀는 왜그리도 뻔뻔스럽게도 나와대는지..
빈속에 먹을것을찾아 풀밭을 헤메는데 봄철의 풀은 모두가 먹거리라는 어른들의 말씀대로 모두가 나물이요,모두가 국거리이다.
논두렁에 지천으로 돋아난 삘기(초여름에 솜 모양의 꽃이 피는풀인데 표준말을 모른다.)를 한주먹씩 뽑아들고 껌처럼 씹어댄다.
개울에서 가재를잡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구워먹는다.
불을 피우고 마을에 들어오면 군청에 다니는 흥규아버지가 손냄새를 맡아보고 단체기합을 주기때문에 냄새가 없어질 때 까지 씻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가재에 디스토마균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귀에 못이박히게 가르치지만 가재의 그 고소한 맛에 항상 공염불이다.
등하교길의 빼놓을수 없는 재미가 바로 굴렁쇠 굴리기이다.
굴렁쇠는 보통 인분을 퍼나르는 통을 조여주는 대나무로 만든 굴렁쇠나 함석으로 만든 물통을 조이는 둥그런 테 같은 것이 주종이었다.
간혹가다 자전거 바퀴의 살을 빼내고 남은 구렁쇠로 가지고 오는 아이도 있었는데 굴렁쇠로써 그이상 가는것은 없을 듯 싶다.
이 굴렁쇠를 마을에서부터 학교까지 한번도 안쓰러뜨리고 가는친구가 챔피언이 되는것이다.
잘굴리는 아이들은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가리지않고 내달린다.
마을에 TV한대 없던시절,서울에는 마루치,아라치가 실제로 있는줄로 알던시절,하교길 갑자기 소나기라도 만나면 논밭의 두엄을 덮어놓은 비닐포대를 둘러쓰고 비를 피하던 어린시절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점점 기억에서 조차 희미해져 가는 요즘이다.
가정의 경제적 사정도 있었고,여러가지 피치못할 사정도 있었겠지만 등하교길의 어려움도 무시하지 못할 중도탈락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부모님의 무지에서 비롯된 교육열의 미진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가지 사정상 남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그나마 입학식날 부모님의 손을잡고 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친구들 입학하러 가는길에 따라가서 입학식을 치를 정도였으니까.
사방 둘러봐도 첩첩이 둘러쳐진 병풍같은 산중에 우리마을에서 이웃마을을 건너다 보기라도 할려면 반드시 동구밖을 나와 산모퉁이를 돌아야 이웃 마을을 볼수 있는 곳,이 작은터에 400여년 전 처음 터를 잡은이래 씨족이 대부분인 1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1천여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게 된 마을.
우리마을에서 학교에 가려면 꼭 건너야 하는 냇물이 있었다.
폭이 15미터 정도 되는 실개천이지만 여름 장마비에 물이라도 불어나면 어린 우리들의 학교길에 발목을 붙잡곤 하는 골치아픈 개천이었다.
징검다리로 놓아둔 돌맹이를 들추면 가재가 잡힐정도로 맑고 작은 개울인데 물이 불어나면 어른들도 건너기 힘든 무서운 하천으로 변하곤 했던 것이다.
우리가 4학년 되던 해 봄에 다리(?)가 개통되었다.
사실,말이 다리지 논에 물을 대기위한 수로 였는데 길다란 통나무에 홈을파서 대어놓았던것을 시멘트로 바꾸어 놓았을뿐이다.
폭50Cm정도에 길이 15m정도의 하천 횡단 수로에 뚜껑을 덮어서 "사랑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개통을 하였다.
수로건 다리건 학생들의 편의를 생각한 시설물이어서인지 교장선생님까지 참석하신 큰 행사로 치루어진 개통식,이 다리의 개통으로 우리마을 아이들은 한가지의 낙을 잃는 고통도 뒤따랐는데,장대비가 퍼붓는 여름날은 학교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우리마을 아이들은 물을 못건너 학교에 못갔다고 이장님이 확인만 해주시면 결석처리가 안되던 것을 이제부터 안통하게 된것이다.
아침이면 마을앞 공터에 책보를 메고 든 아이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4열 종대로 늘어서서 애향단장의 구령에 맞추어 힘차게 행군을 한다.그때 의례 나오는 행진곡은 "공산당은 싫어요. "
원수의 총칼앞에 피를흘리며- 마지막 주고간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울고넘는 운두령고개- 새무덤 오솔길에 산새가 운다-
이노래가 나오면서부터 이노래를 안부르고 학교에 간 날은 거의 없었다.
보리밥 노래도 많이 불렀던것 같다.
먹고사는 주식이 꽁당 보리밥인데도 선생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세뇌 시켜야만 했던 절박한 농촌의 사정.
하지만 어린 우리들이 그 어려운 사정을 어찌 알았으랴?
새벽 이슬을 촉촉히 머금은 학교길을 가자면 아른한 봄볕을 받아 싱그럽게 올라오는 찔레순이 탐스럽다.
통통한 순을꺾어 껍질 벗겨내고 물기가 촉촉한 속살을 베어먹으면 입안에도는 풀향기와 단맛에 과자보다 더한맛을 느끼곤했다.
학교길 십리길은 부지런히 걸어야했다.
학교 바로앞에 있는 마을아이들을 항상 부러워하면서 다닌 초등학교.
하교길은 등교길보다 훨씬 즐거웠다.
집에 일찍가면 일을 해야되기 때문에 항상 같은마을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같은 시각에 집에들어가곤 하였다.
이런 사정을 선생님이 아시고 학교에서 노는것을 제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놀이는 주로 학교밖에서 이루어졌다.
학교앞 범순이네 가게에서 1원을주고 독사탕(하얀색의 조그마한 사탕으로 진한 단맛이나며 중앙부에 콩같은것이 들어있는데 돌처럼 단단하여 독사탕이라고 부른다.)한개와 도화지 한장을 사면 먹거리와 문구까지 한꺼번에 장만을 하는 효과가 난다.
그 사탕을 입속에넣고 가능한 한 천천히 녹이려고 침을 조금씩만 묻혀가면서 두마을을 지나온다.
그러면 드디어 우리구역- 우리구역에 들어오면 구부나무라는 곳이 있다. 길옆의 산에 이상한 모양으로 굽어 올라간 거목이 있었는데 우리가 학교다닐 즈음에는 늙어 죽었는지 잎사귀 다떨어진 고사목으로 남아있었지만 지명은 그대로 구부나무였다.
그곳에 처음 선배들이 지어놓은 원두막 모양의 아지트가 있었는데 제법 집 모양을 갖춘 오리나무 이층집이었다.
이곳에서 나른한 오후 햇살을 나뭇그늘로 가린 채 한숨을 자고나면 약속이나 한것처럼 다시 일어나 마을로 향한다.
집에서 담아온 도시락은 2교시만 지나면 다 비워지고 점심시간에 배급되는 옥수수죽도 한입에 다 마셔 버렸지만 영양분없이 배만 채우게 만든 음식들은 항상 허기지기만 했다.
양은으로 만든 도시락은 형식적으로 칠해놓은 노란색의 도금이 벗겨지고나면 책이란 책 모두를 회색으로 칠하고,김치국물에 찌들은 책들은 벌건색의 모양이 보기에도 사납거니와 온갖냄새에 찌들어 교실에 항상 역겨운냄새를 풍겨대었다.
항상 어려운 선생님앞에서 눈치없는 방귀는 왜그리도 뻔뻔스럽게도 나와대는지..
빈속에 먹을것을찾아 풀밭을 헤메는데 봄철의 풀은 모두가 먹거리라는 어른들의 말씀대로 모두가 나물이요,모두가 국거리이다.
논두렁에 지천으로 돋아난 삘기(초여름에 솜 모양의 꽃이 피는풀인데 표준말을 모른다.)를 한주먹씩 뽑아들고 껌처럼 씹어댄다.
개울에서 가재를잡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구워먹는다.
불을 피우고 마을에 들어오면 군청에 다니는 흥규아버지가 손냄새를 맡아보고 단체기합을 주기때문에 냄새가 없어질 때 까지 씻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가재에 디스토마균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귀에 못이박히게 가르치지만 가재의 그 고소한 맛에 항상 공염불이다.
등하교길의 빼놓을수 없는 재미가 바로 굴렁쇠 굴리기이다.
굴렁쇠는 보통 인분을 퍼나르는 통을 조여주는 대나무로 만든 굴렁쇠나 함석으로 만든 물통을 조이는 둥그런 테 같은 것이 주종이었다.
간혹가다 자전거 바퀴의 살을 빼내고 남은 구렁쇠로 가지고 오는 아이도 있었는데 굴렁쇠로써 그이상 가는것은 없을 듯 싶다.
이 굴렁쇠를 마을에서부터 학교까지 한번도 안쓰러뜨리고 가는친구가 챔피언이 되는것이다.
잘굴리는 아이들은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가리지않고 내달린다.
마을에 TV한대 없던시절,서울에는 마루치,아라치가 실제로 있는줄로 알던시절,하교길 갑자기 소나기라도 만나면 논밭의 두엄을 덮어놓은 비닐포대를 둘러쓰고 비를 피하던 어린시절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점점 기억에서 조차 희미해져 가는 요즘이다.
'대청 긴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릴적 추억하나-자장면 (0) | 2005.07.26 |
---|---|
매향리 바닷가 (0) | 2005.07.14 |
나의살던 고향은 - 2 (0) | 2005.07.08 |
나의살던 고향은 - 1 (0) | 2005.07.07 |
그리운 학교길-세번째 이야기 (0) | 200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