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헤아려 보니 1970년도 쯤 이었을 것이다.
형님과 누님들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인천의 바닷가에 터전을 잡은 덕분에
그나마 다른 아이들보다 서울구경을 일찍 할 수 있었다.
산길을 한시간 정도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곳엔 외딴집에 구멍가게를 하는 곳인데
만수네집이라고 불리던 그 집에는 이웃한 마을의 나그네들로 항상 복잡하였다.
키가 큰 포플러나무가 양쪽으로 도열을 한 버스길에 뽀얗게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버스가 보이면 일행은 제 몸보다 더 큰 봇짐을 메고 인상 험한 조수(남자안내원)가 밀어넣는
입구로 몰려들었다.
얼굴의 살가죽이 떨려 간지러울 정도의 진동속에 고갯길을 흔들리며 읍내까지 가노라면
멀미에 얼굴이 노~래지고, 급기야는 만수네집에서 사먹은 그 아까운 카스테라 빵까지
토해내야 했던 그 징그러운 버스.
그래도 형님집에 가져다 주라는 돈부가방은 죽어라 하고 어린 등에 매달려 있었지.
아침에 집에서 출발하여 남원역에서 용산행 기차를 타는 시각은 밤 11시 50분 쯤..
남원역에 도착하면 또 다시 한없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어떤때는 재수좋게 누군가가 두고간 표지에 아름다운 김창숙 정도의 표지얼굴이 나오는
주간지를 주워볼 수 있었지.
그런 날이면 인천까지의 그 지루한 여정도 그리 힘들지 않을 정도로 어른들 보는 책에 빠져서
갈 수 있었다.
대합실에 오가는 이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여기저기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들 시간이면
개찰구가 열리며 경찰 비슷한 차림의 역무원이 두꺼운 표를 한장씩 구멍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남원에서 용산까지 요금 800원.
영등포에서 갈아타도 된다는데 왜 차비도 더 들고,거리도 더 먼 용산까지 굳이 갔었는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당시 완행열차의 종점인 용산에서 갈아타야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형이나 누나가 그렇게 시켰는지도..
아니면 촌놈 한강다리 구경 시켜주려는 배려가 있었을지도..
타이야표 통고무신과 무명옷에 상고머리.
그시절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그 모습이다.
바로 전쟁고아 같은 모습..
그래도 시골에서는 멋깨나 낸다고 다듬은 몰골인데 열차가 서울쪽으로 올라가면서
이 행색은 이내 "아닌" 모습이 되고만다.
이상한건 전주까지는 "아따 거 성님,머땀시 그래쌓쏘." 하던 사람들의 말씨가
전주와 이리를 지나면서 참으로 생소한 서울말씨로 바뀌니 원..
밤새 밖으로 지나는 시커먼 풍경에 지친 소년은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땡이는 파김치처럼 무너져 내린다.
용산역에 도착하면 아침 8시 반.
고무신을 신으려니 물이 흥건하다.
뭔가 이상하지만 얼른 그 물을 비워내고 서둘러 내릴밖에..
가만..생각을 하니 앞쪽에 앉았던 아기엄마가 아이 오줌을 고무신짝에 받아놓은 모양이네.
친구 일표와 가던 날에는 영등포에 내려 그의 고모가 다니는 방림방적에 가서 면회신청을 한다.
면회신청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두 소년은 곡식가방을 앞에 놓은채 쪼그리고 앉아서
또 한없는 기다림의 시간속에 빠진다.
아마도 우리의 행색을 우습게 여긴 경비가 일부러 뜸을 들이고 면회시간을 늦추는 지도 모를 일..
그런데 쪼그리고 앉은 우리에게 공장에 드나드는 누나들이 십원짜리 동전을 주고간다.
안받으려 하는데도 아주 손에다 쥐어 주기까지..
나중에 인천에 도착하여 누나한테 그 이야길 하니 배꼽을 잡고 웃으며
우리 행색이 거지와 같으니 던져준 동냥이랜다.
아뭏튼 난 그날 320원의 거금을 동냥해왔다.
그때 경제원칙을 알았더라면 방학내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을텐데..ㅎㅎ
서울에서 인천에 이르는 철도에는 웬 패싸움도 그리 많은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은 떼지어 다니면서 다른 교복들과 싸움을 벌리기 일쑤 아닌가..
열차가 인천에 도착하고 역에서 30분을 걸어가면 온 동네가 시커먼 만석동에 이른다.
만석동 판유리공장(한국유리) 뒷쪽의 마을은 항상 시커먼 먼지를 둘러쓰고 사는
빈민촌이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고 커다란 자동차가 다니는..분명 선바우 보다는 볼것이 많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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