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못 보내겠다는 큰형님의 선포에 중학교 졸업을 한지 사흘째 되는 날
무작정 상경을 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신지 꽤 여러해 됐지만 형님 살아생전에 왜 진학을 반대 했는지
단 한번도 묻지 않았었다.
시골에서는 보기드문 오칸집에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사는 집이었지만 자식들이나
동생들 교육에는 왜 그리도 인색했는지..
이 가게 저 공장 떠돌면서 학비를 벌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동생을 언제나 눈물바람으로
보던 누나는 공장의 기숙사를 나와 전세 60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나를 불렀다.
그곳이 바로 인천의 자유공원 아래 송월동이라는 구옥이 밀집된 비탈마을.
그 당시 동일방직에 다니던 누나의 봉급은 잔업에 야근수당까지 합쳐서 겨우 5만8천원.
누나 도움 안받겠다고 할까봐 절대로 보여주지 않던 봉급봉투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심한 갈등에 쌓여야만 했다.
저 피같은 돈을 쪼개어 방세내고,식비내고,내 차비에 학비까지..
게다가 누나 위의 형까지 꼽사리 끼어 누나의 부담만 늘어가는 판국이었다.
양복점에 다니는 형은 돈도 안가져 오면서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티격태격
하기 일쑤였고..
내 처지에 대학을 바라보고 수업료 비싼 인문계 학교엔 진학할 엄두도 못내고
수업료가 인문계의 절반 수준인 공업계 학교로 진학을 했다.
하긴 그당시에는 공업계 학교의 인기가 훨씬 높아서 공업계 선발을 먼저하고 난 다음에
인문계 선발을 했었지만..
연료가 안드는 여름이 좋았다.
더우면 그늘을 찾고,돈 안드는 시립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여름이 훨씬 나았다.
겨울이 되면 연탄값에 취사용 곤로에 드는 등유에..또 비싼 겨울옷에..
불쌍한 누나의 부담만 커지는 것이다.
저녁에 마시던 물을 아침에 찾으면 윗목에서 꽁꽁 얼어있어 젓가락으로 구멍을 내야
마실 수 있었다.
이러구러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데 걱정이 한가지 더 늘었다.
남들은 즐거울 수학여행이 내겐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수학여행은 일찌감치 마음으로 포기하고 사는데 수학여행 날짜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날
주인 아줌마께서 조용히 손에 뭔가를 쥐어 주신다.
가신 다음에 손을 펴보니 아니..이게 뭔가..
펴 본 손에 현금 이만원이 있는게 아닌가..
주인집 부부는 참 조용하신 분들이다.
충청도 서산이 고향인 아저씨와 그 인근에 친정을 두신 아주머니는 항상 마음으로
나의 성공을 빌어주고 누나의 은공을 잊지 말라고 조언해 주셨는데
이제 물적인 도움까지 주시는 거다.
그날 밤 누나와 상의를 하고 정중히 돌려 드리는데 이분들...
정말 무섭게 호통을 치신다.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 하는게 아니라면서..
우리도 이 돈에 적은돈이 아니지만 일생에 단 한번뿐인 학창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기에 누나같은 마음으로..형같은 마음으로 주는거라며..
정 미안하면 나중에 성공해서 나보다 못한이들에게 갚으라고 하시면서..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에는 큰누나 집에서 잤다.
큰누나 또한 형편이 넉넉치 않아서 내가 얹혀 살수도 없었지만 수학여행 가는날만은
자고 가란다.도시락도 싸주고,용돈도 주고싶다고..
아침에 누나가 깨우는데 일어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동생 왔다고 여름동안 안피우던 연탄불을 피웠는데 가스가 새어 들어온 모양이다.
김치국물 먹이고..약사다 먹이고..
미리 지불한 여행비가 아까워서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갔는데 여행 내내 귓속에서 웅웅거리고
삐~소리가 나고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주인 아저씨께 드릴 선물만은 잊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
오색에서 머루주를 샀다.
지금 생각해도 오지게 비싼가격..6천원이 넘는..
양섭이는 주인집 아이 이름이다.
내가 처음 이집에 들어갔을 때 네살쯤 되는 어린아이였는데 나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지금쯤 서른이 넘는 어른으로 장성 하였을텐데..
내가 3학년때 누나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상대방은 진해에서 해군 하사관으로 근무하는 군인이었다.
그 전에도 몇번의 중매가 있었지만 내 교육 때문에 거절하고..미루고 있던터라
이번만은 미루지 말라고 우겨서 내려 보냈다.
그래서 지금은 경찰생활을 하는 매형인 그 군인과 누나의 신혼생활이 진해에서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내 처량한 자취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그 비참한 자취생활 보다는 나았지만 라면으로 일주일 때우기는 보통이고
언밥 녹여먹는 일도 비일비재..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주고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주신 주인아저씨,아주머니가 안계셨더라면
과연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지..
삼십년이 되어가는 세월을 흘려 보내면서 참으로 많이도 그리워 했던 그분들..
지금 월미도에 살고계신 그분들은 우릴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러기에 내겐 더욱 그리움만 더한다.
양섭이 아줌마! 저 그렇게 도움받고 꿋꿋하게 살아서 이렇게 또 한세월을 보내고 있답니다.
위태위태 다니던 고등학교 마치고 큰학교도 덤으로 구경하고 말입니다..
좀 더 건강하셨더라면 옛 이야기 함께 나누며 즐거웠을텐데..
두분의 건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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