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20년만에 다시만난 '김천 직지사'

대청마루ㄷ 2006. 7. 14. 10:55

구름도 자고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흘러간 그세월을 뒤돌아 보면

주름진 그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흘러간 가요의 노랫말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그 시절의 애환이 그대로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큰 산과 큰 물은 사람의 무리들을 곳곳에 갈라놓아 그들의 말씨와 성격까지도 서로 다르게 하였으니 태백 준령이 높다란 방벽을 쳐놓은 추풍령을 넘어서 한양과 영남을 오가던 이들의 수많은 사연들도 예사롭지는 않을게다.

 

직장 상사가 상을 당해 갑자기 찾게 된 경북의 서북관문의 유서깊은 도시 김천은 내 직장생활 초년병때의 애환과 추억이 서린 곳이다.이 김천이 바로 영남에서 추풍령을 오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고, 반대로 충청도에서 영남으로 들어오기 위한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그런저런 사연이 있는 도시인지라 문상이 끝난 후에 장맛비 잠시 멈춘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과 열풍에도 아랑곳 없이 직지사로 향했다.

참으로 오랫만에 찾은 직지사이다.1984년도에 이곳에서 근무를 했으니 20년이 넘게 흘러버린 세월이다.

 

@ 직지사 매표소 옆 솟을 대문에는 '동국제일가람 황악산문'이라고 쓴 현판이 20년 전의 그모습으로 반긴다.

 

오랫만에 찾은 곳에서 그 옛날의 모습과 풍경을 만나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가운 생각이 든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서기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직지(直指)라는 명칭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흔히 고승 도선국사가 금오산에서 황악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곳에 큰 사찰이 들어설 기운이 있다.'고 하여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도 전해진다.즉,손가락으로 가리키다(直指)라는 뜻이라는 이야기이다.

@ 경내로 들어서니 비오듯 쏟아지던 땀을 멈추게 하는 나뭇그늘과 한여름을 노래하는 매미들의 합창이 즐겁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운수동)

전에 내가 이 마을에 있을때는 경상북도 긍릉군 대항면 운수동이었다.

이제 김천시로 편입이 되어 개칭이 되었다면 금릉이라는 지명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것인가?

@ 만세교를 건너면 우측으로 이곳을 근거로 하였던 수많은 고승들의 공덕비가 있다.

 

그 시절 매표소의 아가씨를 아는 것 만으로도 무슨 큰 배경 쯤 있는 것처럼 서너명이서 깔깔대며 무료입장을 하던 그곳을 나 혼자서도 2500원의 거금을 들여 들어가보니 역시 음식도 제값을 주고 먹어야 제맛이듯이 눈에 보이는 풍경도 돈값을 한다.

@ 산문의 대명사인 일주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황악산은 신기하게도 해발 1,111m의 높이를 가진 산이다.

그에 버금가는 고지에 있던 나의 근무처는 바람재라는 곳으로 올랐다.

이번에 직지사를 오르면서 보니 그 험하던 곳으로 길을 뚫어 이제는 포장을 한 모양인데 내가 근무하던 그시절에는 경운기나 트랙터 또는 군용트럭과 오토바이 등 이 길을 오를 수 있는 차량은 한정돼 있었고, 택시로는 휘발유를 쓰는 포니택시가 이곳을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차량이었다.

 

@ 이 기둥의 흔적을 보면 한다리로 지켜온 세월의 풍상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경기 북부의 접적지역에 있는 화악산과 발음이 비슷하여 통화중에 상대방이 혼동을 하기도 했던 이 황악산은 추풍령이 남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또 한번 솟구치는 분수령이 된다.삼도봉이 있는 민주지산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산중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 일주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대양문이고, 문 사이로 금강문이 보인다.

 

 

@ 겁이많은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지나가기를 꺼리는 천왕문이다.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에서 밖에서는 우측으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이곳을 비켜가는 어느 부부의 목소리가 들린다.

@ 죄지은 자를 금방이라도 없애 버릴 것 같은 우람한 체구의 금강역사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 대웅전을 보려면 지나야 하는 만세루 아래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만세루를 지나니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는 대웅전이 기다리고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이다.직사사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죄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명전'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선조 32년(1602년)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양 옆으로 서 있는데 상륜부를 새로 올린 모습이 보인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말기(9세기)의 것으로 원래는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의 도천사 터에 비로전 앞의 것과함께 쓰러져 있었는데 197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보물 606호)

 

@ 대웅전 앞마당의 모습을 찍어보았다.좌측건물이 요사채이고, 우측이 대웅전이다.

 

@ 세분의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의 위용

 

@ 목어와 범종,법고를 모아 둔 전각의 이름을 왜 지종각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 나그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기에 충분한 늙은 등나무가 정겹다.

 

 

@ 이 등나무의 아랫부분을 보면 그 풍상이 새롭게 이해된다.

@ 잘 꾸며놓은 정원같은 경내의 풍경

 

@ 숲길 사이로 본 관음전

 

@ 관음전 안의 관음보살상

 

@ 나이 든 배롱나무(목백일홍)의 미끈한 몸매 뒤로 수없이 들어선 전각과 당우들

 

@ 명부전

 

명부전은 고려태조 14년(931) 능여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조선 현종 9년(1668)에 재건 되었다고 한다.

 

 

@ 비로전 앞 삼층석탑

 

@ 멋진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경내는 산책길로도 그만이다.

@ 연륜이 보이는 나무 뒤로 황악루가 보인다.

 

@ 비로전 옆의 약사전

 

@ 우거진 수림과 잘 어울리는 황악루

 

@ 안양루(安養樓)라는 멋진 누각이 있길래 가서 보려고 했더니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 절 입구에 흐르는 물이 이상하게 뿌옇다 했더니 범인이 이곳에 있었다.

 

@ 예쁘게 단장된 집이 여염집 같아서 한번 들어가 본다.

 

@ 스님의 것 같은 신발이 단정하게 놓여진 이 당우의 이름은 '서별당'이다.

 

@ 서별당의 우른쪽으로 꺽어 지은 이 당우의 이름은 '망일정'이다.

   이름으로 보아 이 집에서 해돋이를 보기에 좋은 모양이다.

@ 이 집 마당에 보이는 목가적인 풍경...하도 정다워서 내 노트북의 바탕에 깔았다.

 

 

서별당에서 정면으로 커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한번 들어가 본다.

 

@ '청풍요'라는 요란한 이름의 이 건물 뒤란에 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것으로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동 낙동강변에 있던 강락사 터에 무너져 있던것을 1968년에 선산군청으로 옮겼다가 1980년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이 탑도 역시 상륜부가 없어져서 추정 복원했다고 한다.(보물 1186호)

 

@ 고샅을 뒤지니 이런 연못도 보이는데 물속에는 물고기가 제법 많다.

 

@ 이 건물의 뒤를 돌아 보니 상당한 넓이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 마당에는 부서진 것을 발굴해 놓은 듯 한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 청풍요(淸風寮)라는 이 건물의 용도는 박물관이었다.하지만 이날은 열지 않아서 전시물을 볼 수 없었다.

 

@ 청풍료의 야외전시물 중 하나인 석물

@ 수많은 기와가 쌓여 가는걸 보니 또 다른 당우의 건축을 위한 기와불사가 이어질 모양이다.

만세루 아래에 운치있는 길이있어 쭈뼛거리며 들어서 보니 일단 '출입금지' 팻말이 없는것으로 보아 나 같은 사람도 출입이 가능한가보다.

하지만 워낙에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곳이라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본다.

이 커다란 건물은 '설법전'이라는 건물인데 교회로 말하면 '대성전'쯤 되는 모양이다.

종교시설들은 워낙에 일반인출입금지 지역이 많아서 잘 못 돌아다니다가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라..

 

설법전 아래를 보니 설법전과는 비교도 안될 어머어마한 고래등이 보인다.

일단 여기서는 문이 잠겨있는 걸로 보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터라 우측으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나이 들어서까지 이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니 이 무슨 망발인가..ㅎㅎ

 

이 건물은 설법전을 아랫쪽에서 본 모습이다.

법화궁(法華宮)이라는 건물 이름이 붙여진 이 전각만 해도 어머어마 한데 그 옆으로 더욱 커다란 건물이 보이니 발걸음이 급하다.

 

 

법화궁 오른쪽으로 남월료(南月寮)라는 커다란 건물이 있다.

일하시는 보살님에게 이 건물이 뭐 하는 건물이냐고 물었다가 혼날까봐 묻지도 못했다.

남월료를 돌아가자 곧바로 그 고래등의 정체가 나타난다.

마당에는 넓다란 잔디광장을 가진 커다란 동기와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앞에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물길을 돌려 만든 돌 식수대가 있는데 아직은 사용하기 전인가 보다.

 

 

 

 

만통전(萬通展)이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신식 대웅전 격인가?

아직은 인적도 없고 문지방 너머 호구조사를 할 용기가 없어 궁금증만 안은 채 발길을 돌렸다.

아뭏튼 지금까지 내가 본 한옥 중 가장 큰 건물이다.

 

@ 노송과 돌담과 한옥이 잘 어우러지는 만통전의 뒷뜰

만통전을 나와 우측으로 내려가면 황악산 등산로를 따라가게 된다.

직지사에 부속된 수많은 암자들의 진입로이기도 한 이 길가에는 만통전 마당앞 축대와 푸른 식물들이 어우려져 여름잔치를 하고있다.

그 아래에는 때마침 불어난 수량으로 제법 폭포의 모습을 갖춘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노거수 아래 정성으로 놓여진 이 돌들은 얼마나 많은이들의 소망을 담고 있을까.

 

歲橋라는 글자만 남아있는 이 표석으로 보아 만세교의 萬자가 부러져 나간 옛 다리의 표석으로 보인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 아래에는 만세교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가 놓여있다.

만세교를 건너면 '한국의 명소 직지사 약수정'이라는 석물이 보이는데

 

50미터 쯤 들어가니 과연 물맛좋은 약수정(우물)이 기다리고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지만 장마에 빗물이 어느정도 녹아들었을테니 장마가 그치고 나면 썩 괜찮은 물맛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 산문을 나가면서 보게되는 문구인데 학문이 짧은 나로서는 누군가의 도움없이 해석이 불가능한 문구이다.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직지사는 역시 대 가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22년 전 젊은 눈으로 보던 그곳과 이제 반백이 되어 찾아가 본 그곳과는 사뭇 다른 감회가 있었다.

어제 아는 분에게 직지사에 다녀왔다고 하니까 '머리깎을래'냐고 하시는데 딴으로는 기분이 상함을 느꼈다. 오래된 사찰은 종교의 의미보다 역사의 의미가 클진대 왜 사람들은 굳이 종교를 분리하여 역사는 보려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