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나는 도회지에서 다닌 고등학교 동창 모임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모임이 훨씬 살갑다.
우리 마을은 오씨 집성촌으로 마을 친구들 대부분이 몇촌으로 연결되는 같은 항렬이거나 조카 또는 고모 등으로 엮여있어 집안 모임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들만큼 정겨운 이들이고, 윗마을 친구들까지도 한마을이나 다름이 없어 지금까지도 도회지에서 느끼지 못하는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있다.
초등학교는 농촌의 인구감소로 폐교되어 지금은 고시원으로 변해있어서 그런지 모임까지도 잘 되지않지만 중학교는 아직 명맥이 유지되고, 동창모임 또한 정있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처음 동창회를 나가게 된 것은 몇년 전 다모임이라는 사이트에서 찾은 몇몇의 동창들이 모여 이곳 다음에 카페를 개설하면서 부터이다.
그동안 사는데 전력투구를 하다보니 옆과 뒤는 볼 겨를도 없이 달려온 세월에 친구까지도 다 분실한채로 마흔의 중반까지 달려와버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이대로 늙어 죽어간다면 얼마나 섭섭한 일인가?
각 마을 친구들 중 카페에 먼저 가입한 친구들을 이장이라는 칭호로 부르면서 이들을 독려하여 흩어진 친구들을 모아보니 동창들 대부분의 안부를 알게 되었다.
사십 중반이지만 벌써 손주를 본 여자동창도 있고, 세상을 떠난 친구도 몇 있었다.
<사진은 고향땅에 뿌리를 내린 친구의 장어구이집에서 지난 여름에 모인 친구들의 모습>
헌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메스컴에서 떠들어 대는 그 '위험한 동창회'라는 편견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창회에만 간다고 하면 가재미 눈을 뜨고 보는 아내의 시각과 아내의 불신을 부추키는 이웃들의 언행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몇년이 흐르면서 일년에 한번있는 동창회에의 참석은 고착화되고, 그야말로 위험한 동창회가 아니라 안전한 동창회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갔다.
며칠 전에는 아내의 동창회가 광주에서 있었다.
거리상 도저히 일박을 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기꺼이 보내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멈칫거린다.
하긴 그동안 좋은소리 한번 못듣고 마음상해서 동창회에 나갔던 남편의 마음을 외면할 수야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기꺼이 보내주면서 덕담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서 보고싶은 친구들 반갑게 만나보고 집 걱정하지 말고 스트레스 해소 하고 오라고..
모임 중 동창모임이 최고라고..
남녀공학이었던 것이 얼마나 복받은 일이냐고..
바로 그날 이웃 부부와 저녁을 같이 먹게되었는데 그 집 부인이
"ㅇㅇ아빠는 참 간도 크시네요. 아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동창회에 외박을 보내요? 그것도 남녀공학이라면서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나이가 불혹을 넘어선 대한민국의 아줌마를 집에 묶어 놓는다고 안전한 일인가?
평상시 집안 잘 돌보고 살림 잘하던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정도를 지킬 줄 알고 가족 소중한 줄 안다.
실컷 놀다 오라고 보내지만 그곳에 가서도 온통 가족 생각으로 머릿속이 채워져 있고, 돌아올 때는 뭔가 가족에게 먹일 특산품이라도 사 들고 오고 싶은 것이다.
편견이 화를 부른다.
착한 아이에게 '너 도둑놈이지?' 하고 만날대마다 핀잔을 준다면 언젠가는 도둑이 되어 당신 집을 털 것이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일이 어찌그리 많겠는가?
찍힐땐 찍히더라도 일단은 믿어 주는게 낫지 않겠는가?
아내는 지금도 동창회 이야기를 한다.
누구는 어디서 돈을 많이 벌어서 동창회에 한턱 쏘았다느니
누구는 성형수술을 해서 첨에 알아보지 못했다느니..
하지만 처음으로 다녀온 동창회에의 감격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산골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동창회는 불륜의 온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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