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충주 탄금대에서 생각해보는 임진왜란

대청마루ㄷ 2008. 2. 10. 12:55

彈琴臺라는 이름 자체로는 참 낭만적이고 풍광 또한 절경이다.

이곳에서 가야금을 타던 우륵의 마음이야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설움을 달래던 통절한 심정이었겠지만 이미 말을 바꿔 탄 백성들의 마음은 가야국이건 신라국이건 별다름이 없었을게다.

우륵이라는 樂星의 일화에서 얻어진 이름 탄금대는 그로부터 약 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변한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부터 조선침략을 감행한 일본군은 부산·동래 등을 함락하며 파죽지세로 북상을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임명해 이를 방어하도록 했다.

 <여기부터 백과서전 인용>

 신립은 충청도의 군현 병력 약 8,000명을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4월 24일 종사관 김여물(金汝) 등을 이끌고 조령(鳥嶺)으로 진출했다. 이때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만큼 조령의 협곡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을 할 것을 신립에게 권했다. 그러나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인 데 반해 아군은 기병이므로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날 상주(尙州)에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휘하의 일본군에게 패배한 장수 이일(李鎰)이 단신으로 탈출해왔다.

 

신립은 이일에게 전공을 세우라고 당부했다. 4월 26일 이른 아침에 군사를 거느리고 충주성과 5리 정도 떨어진 탄금대로 가서 낮은 저습지에 배수진을 치고 적이 진출하기를 기다렸다. 한편 상주전투에서 승리를 한 고니시의 일본군대는 4월 28일 충주에 도착하여 정오경부터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공격해왔다. 이에 신립은 기병을 출동시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했다.

 

상주에서 패주했던 이일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도망쳐 패전사실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에 왕은 급히 한성을 떠났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충주성에 들어갔으며, 이튿날 뒤따라 북진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일본군과 합세하여 한성방면으로 30일부터 북진하기 시작했다.<여기까지 액과사전 인용>

 

 

 

 

 

내 짧은 소견으로 생각을 해봐도 이날 신립장군이 김여물의 조언들 들어 조령의 협곡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더라면 임진왜란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을수도 있을 정도로 전세가 뒤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급조된 병력 8000명을 가지고 대군과 맞서 평지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전사에 보면 3000의 기병이 주력이었다고 하는데 북방의 수비를 주로 하던 신립장군이 남방 전투의 특성도 파악 못한 채 각 역참에서 징발한 파발마를 전투마로 쓰고, 기병 또한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로 전투에 투입이 되다보니 오합지졸들이 일본의 정예병을 맞아 괴멸을 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전쟁에서 병력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휘관의 판단능력이다. 나라의 살림 또한 전쟁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누구나 패전을 장담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삼대 대첩이 그것이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니겠는가?

 

자연적인 조건이 타국에 비해 불리한 우리나라. 이 나라를 세계속의 강국으로 이끌어 줄 지도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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