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

수도권 방어의 요충지 강화도를 찾아서 - 2 (2011.10.19.수)

대청마루ㄷ 2011. 10. 22. 20:23

강화도의 진,보,돈

 

광성돈대에서 평화로운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쌍충비각이 나타난다.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신미양요때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함께싸우다 순절한 군사 59인의 순절비이다.

이 비각 아래쪽에는 무명용사의 묘 7기가 있는데 이름모를 군사들의 350여 유해를 모아 합장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묘를 신미순의총이라고 한다.-신미양요에 순국한 의사들의 묘라는 뜻

 

신미양요에서 산화한 넋들을 기린 쌍충비각

 

<쌍충비>

 

비는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어재연장군과 그 아우의 전공을 기리는 비이고

다른 하나는 어재연장군과 59 군사의 비라고 한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집을 비각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이 비문의 한자를 풀어 적어놓은 무명용사비가 있다.

1977년도에 복원사업을 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무명용사비의 뒷면

 

<손돌목 돈대 가는 길>

 

광성보 안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손돌목 돈대 앞의 풍경은 가히 목가적이다.

 

오래된 노송과 아름다운 해안의 만남

 

이 아름다운 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원래 이 안에는 돈대 중앙에 무기고가 있었는데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성벽과의 조화

이런 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해야하는 국가적 운명

 

 

 

바다를 지키던 광성포대

 

 

손돌목 돈대 아래 해안에는 광성포대가 자리하고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손돌목돈대

 

해협건너 김포해안에는 해병들이 지키는 초소가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串 중에 가장 끝부분에는 용두돈대가 있다.

지형이 용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용머리에 위치한 용두돈대

 

용두돈대로 가는 길은 성벽을 통과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답사를 나온 학생들을 피해 사진을 찍기가 수월치 않아 그대로 찍어둔다.

 

본토인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이 좁은 바닷물을 그때는 염하라고 불렀나보다.

소금물로 된 강이라는 뜻인가?

실제로 서울의 한강보다도 좁은폭의 바다인데좁은 바다인만큼 통과하는 물살은 거세다.

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던 인조임금의 실수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손돌목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나보다.

 

 

후에 청나라가 된 후금의 공격을 받은 인조임금이 김포에 이르렀을때 이 해협의 급류를 보고 심히 놀란다.

이때 손돌목이라는 사공이 뱃길 안내를 맡았는데 물살이 점점 거세지는 곳으로 배를 몰아가면서도 태연한 것이다.

이제 "이 사공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인가?" 라는 의심까지 하게된 임금은 급기야 사공을 죽이라고 명한다.

사공은 "바가지를 띄워서 바가지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노를 저어가면 강화땅에 안착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칼을맞아 죽게된다.

바가지를 따라 강화땅에 무사히 도착을 한 임금이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손돌목의 유해를 거둬서 후하게 장사 지내라고 명한다.

 

아래에서 본 손돌목 돈대

 

고개를 오르며 다시금 보게되는 손돌목돈대

 

이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다시금 안해루에 이르게 된다.

 

안해루에서 본 바다

 

 

광성보는 답사를 온 학생들과 어르신들로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맑고푸른 가을 하늘아래 역사를 배우러 몰려든 인파가 가상하고 고마울 뿐이다.

역사를 소중히 하는 민족이 우수한 민족임을 교육당국에서 알았으면 한다.

 

강화도의 관문에 위치한 갑곶돈대

 

 갑곶돈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난 2차선 길가에 있는것이 갑곶돈대이다.

이곳에는 천주교 갑곶성지도 나란히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케 한다.

 

 

 강화도에 부임받아 목민을 했던 관리들의 공적을 기린 비석군

 

 

강화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공히 전란을 피해 임금이 파난을 하기에 최적지였나보다.

고려의 수도인 송악에서나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급류때문에 쉽사리 적이 접근할 수 없는 최적의

요새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강화의 어딜가나 이런 군사시설이산재해 있어 수도권 방어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아니 피난의 요충지라는 표현이 맞을까?

 

어느 주장에 보면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가 갑곶돈대라는 주장을 본적이 있는데 지금 이자리를 정한것이 올바른 고증을 거쳐 복원했을거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