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 산행일지

권율장군의 호령이 생생한 독산성 세마대지(경기 오산)

대청마루ㄷ 2006. 6. 13. 16:26

권율장군 하면 뭐니뭐니 해도 행주치마 여인들의 땀내음이 생생한 행주대첩이 떠오른다.

하지만 때를 그보다 조금만 앞으로 거슬러가면 전라관찰사이던 장군의 忠路마다 만들어진 전적지가 도처에 있음을 알 수 있다.만고의 충신인 충무공 이순신을 배척할 때 '난 아니오!'를 외치며 그의 충정과 재능을 임금에게 충언했던 인물.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의 수난에 권장군이 없었더라면 과연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은 장군의 수많은 전적중의 하나인 독산성 전투의 현장을 찾아가본다.

 

 

독산성(禿山城)은 경기도 오산시 양산이라는 나즈막한 산의 정상부를 휘두른 작은 규모의 석성이다.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을 격파하여 진군을 더디게 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행주산성으로 향해 수도 한양으로 쳐들어 오는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도록 했던 역사속의 요충지이다.이런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실제로 6.25 동란때에는 남하하던 북한군과 유엔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시작했던 초전지가 바로 이웃해있다.

 

 

6월6일 현충일의 세마대에는 초여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가족단위의 나들이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세마대라 함은 '말을 씻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과 비슷한 재치를 보여주는 통쾌한 전쟁사이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하여 일단 독산성을 수비성으로 정하였으나 막상 터를 잡고보니 2만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사용할 물이 모자랐다. 이를 짐작한 왜군들이 겹겹히 포위를 하고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저 높은 곳에서 하얀물로 말을 목욕시키는 장면이 보이는 것이다.이에 생각을 고쳐먹은 왜군이 포위를 풀자 이때를 기다리던 우리군이 그들을 파죽지세로 몰아보쳐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이다. 이 때 말을 씻기던 하얀 물은 물이아닌 쌀이었던 것이다.

 

 

산다운 산이 거의없는 오산시에서는 그나마 산다운 규모를 갖추고 세마대라는 역사속의 유적까지 갖춘 이 산에 들이는 정성은 보통이 아니다.하지만 수원성의 경우처럼 철저한 고증을 거친 처계적이고 과학적인 복원과 보수를 시행했을때에야 비로소 명실공히 인정을 받는 역사유적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하지만 정확한 고증이 부족한 듯 해 보이는 복원공사로 인해 고성다운 면모가 감해보이니 안타까

운 생각도 든다.회색 시멘트 자국이 역력한 성곽쌓기와 4개의 문이 있었다는 곳 중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은 그 앞이 낭떠러지로 되어있어, 과연 축성 당시에도 저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한

다.

 

 

 

성문의 기둥을 세웠을법한 주춧돌에는 빗물이 고여 썩고있다.

이런 확고한 증거가 있는 유적에 대해서는 시에서 이 성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하루빨리 복

원을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 무르익는 독산성 순방로는 수림이 만들어준 천연적인 산책로가 된다.

이 성의 서쪽에는 울창한 잣나무를 이용한 삼림욕장과 극기훈련장까지 갖추고 있다.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왜 작은산에 애써 성벽을 쌓았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게 된다.

산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천연적인 요새가 되어주는 절벽이 곳곳에 있음을 이내 알게되기 때문이다.

 

 

그날의 역사를 알기나 하는지 무심한 개망초는 6월의 햇살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성벽 위로 난 산책로는 노거수와 어울려 훌륭한 삼림욕장 역할을 하고있다.

 

 

성벽아래에서 자라난 가중나무가 성벽 위에까지 가지를 뻗어 큰 키를 뽐내고 있다.

어렷을적 어머니께서 그리도 정성들여 해 주시던 이 냄새나는 나무의 잎사귀로 만든 반찬이

그리워진다.

 

 

성벽을 따라 돌다보니 이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보적사라는 절이 보인다.

이절의 역사는 모르겠으되 세마대라는 역사적 의미와 보물을 쌓아둔다는 뜻의 절 이름이

그리 어물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적사 앞뜰에 둥지를 튼 부레옥잠이 싱그럽다.

 

 

 

이 성벽을 돌다보면 산딸기가 지천이다.

산딸기가 건강에 좋다고 하니까 이 열매를 따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열성파들도 간간히 보인다.

하지만 이 작은열매를 따려고 성벽에 오르다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어찌할 것인지..

 

 

정상주 노송 가운데 세마대가 보인다.

 

 

이곳에 올라서면 빽빽히 둘러선 수림으로 시원하기는 하나 조망권이 없다.

이처럼 조망이 불가능한 누대는 아마도 찾기 힘들 듯 하다.

 

 

이 현판의 글씨를 볼 때마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것은 아마도 내의 공부가 부족함이라 생각하

면서도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것은 어떤 연유일까..

 

 

누대 아래에는 우거신 노송이 햇볕을 가려주는 넓다란 공간이 있어 길손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놓은 현대식 축성을 한 곳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방치되어 잡초들만 무성한 성벽도 있다.

고대의 로마인들은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석조물들을 짓는데에도 정성을 다하였지만 유지보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그러하기에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조상들의 현명함으로 이천년 뒤의 그 후손들은 가만 앉아서도 일년에 수백만명이 뿌리고 가는 돈

으로 살아갈 수 있음이다.원형이 변하기 전에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그것이 아름다운 역사 유적을 온전히 보전하는 길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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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세마대지(禿山城洗馬臺址)는 1번국도 병점에서 오산사이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탑에 이르기 전에 우측으로 3km정도의 거리에 있다.독산성은 최초 축성시기가 백제시대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당시를 비롯해 여러번의 축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