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과의 전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진도이다.
조선시대 민족의 명운이 걸린 왜란의 정점에서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폐선 13척을 모아그 열배가 넘는 왜의 전함을 수장시킨 명량대첩도 이 진도에서 거둔 대승이었던 것을 보면 3면이 바다인 한반도에서 남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외적을 방어하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해야하는 곳이 바로 이 진도가 아니었나 싶다.
이번 추석에는 그동안 눈속에만 담아 두었던 진도의 풍물을 디카에 담아 기록 보존하기 위해 내 길동무의 첫번째 명단에 주먹만한 디카를 세웠다.
진도의 곳곳을 다니다 보면 유난히도 전적지가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 남도석성은 원형이 보존된
성곽을 민가의 집 담장으로 쓰면서 사는 특이한 마을이다.
사진은 40여호의 마을이 성곽안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의 남문 앞에는 경운기며 트랙터 등 농기계와 트럭들이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성곽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동문 쪽에는 팔을 길게 늘인 노송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남도석성이 있는 남동리의 주민들은 성곽과의 숙명적인 삶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
골목길도 옛길 그대로요, 마을로 통하는 출입구도 옛날 그대로이다.
동,서문과 남문이 이 마을로 통하는 출입구의 전부인 것이다.
어느 민가의 돌담에 붙어사는 담쟁이가 가을볕에 곱게 익어간다.
남문 문루(門樓)에서 바라본 북쪽-만호부 객사가 육중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남문 문루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문루 중 유일하게 목조건물이 복원된 남문 문루이다.
남문에서 바라본 서문, 느티나무 아래가 서문이다.
북벽아래 만호부 객사와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너무나 위험한 서문 쪽 돌계단
서문에서 북쪽 벽으로 오르는 돌계단도 너무 가파르다.
서문에서 위험한 돌계단을 오르면 곡예를 하듯 걸어야 하는 성벽 상부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만호부 건물 뒤에는 커다란 팽나무가 성벽을 부비며 서있다.
성벽위에는 가을볕에 꽃망울을 한껏 터트린 모시나무가 자라고 있다.
북쪽 성벽위에서 바라본 남해바다.
진도의 가을 들판은 절반이 파밭이다.
이 성을 축조하던 당시에도 저렇게 철계단으로 오르내렸을까?
너무나도 무성의한 복원에 화가나기도 한다.
진도 사람들은 진도의 구기자가 최고라고 한다.
청양의 구기자가 유명한 것을 그들이라고 모르겠는가?
그러면서도 한사코 우기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향토 사랑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남문 앞에는 홍교(홍예교)를 만들어 물을 건너게 하였다.
성곽이 복원되기 전에 보던 아름다운 홍교를 다시볼 수 있어 좋다.
자동차 길이 나기 전 이 쌍홍교를 보면서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을 했었는데
이 아름다운 다리의 양쪽으로 콘크리르 다리가 막어서 아쉽다.
남도석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라는 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은 본래 고려 원종 때 대몽항쟁의 선봉인 삼별초군을 이끌던 배중손 장군이 몽고군과 정부군에 끝까지 투쟁하며 남하하여 이곳에 마지막 근거지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패자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것이 우리의 권력과 역사이고 보면 그때의 자료가 온전히 남아있을 리 만무하여 정확한 고증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할 수 있겠다.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이곳은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진도의 내륙에 모여살다가 세종때에 다시 이곳에 만호부를 설치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만호부는 수군의 편제라고 하는데 진도의 최 남단에 위치한 이 마을이 군사적으로 중요했을 것이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제시대 진도에는 세개의 고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그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추론이고 보면 아직도 연구의 가치가 높은 역사의 유물이라 하겠다.
성곽은 그 둘레가 400여미터에 높이가 5미터 가량으로 마을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고려시대에 쌓았던 성곽들은 사라지고 조선 세종 때 다시 축성한 성곽이 무너져 아쉬움이 있었는데 최근 대대적인 보수사업으로 원형이 완공된 모습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정확한 고증이 없이 공사를 서두른 흔적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도 부실하고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벌써부터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만호부의 객사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찾는이들이 씁쓸한 마음을 갖게한다.
진도의 모양을 지도에서 보면 고구마 모양이다.
고구마의 윗쪽이 진도대교이고 꼬리부분이 남도석성이 위치한 남동리이다.
요즘엔 길이 잘 나있어 대교에서 자동차로 40~5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도로표지판에 자주 보이므로 굳이 지도책을 펼칠 필요없이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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