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 여행기록

공세곶 마을에 두고온 것 들

대청마루ㄷ 2007. 1. 23. 10:15

공세리는 천주교 성지인 공세리 성당 이외에도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았다.

물론 그 향기는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코가 필요한 법.

어릴적 굴렁쇠 굴리며 누비고 다니던 정든 고샅의 풍경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갯벌이 펼쳐졌던 바닷가 옅은 물살을 막아 농토를 만들기 전 이 마을에는 바로 집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어촌이었다.

이제는 서해대교 저 멀리까지 밀려가는 바다가 그날의 추억까지도 앗아가버렸지만 그옛날 평화롭던 이 마을의 정경은 이 마을 역사를 모르는 나그네가 유추를 하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다.

 

 마을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삼남의 세곡을 거둬들여 한양으로 운송하기 전에 보관하던 곡물창고를 지키기 위해 쌓았던 석축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은 여염집의 돌담으로 쓰이지만 한눈에 봐도 그시절의 위용을 느낄 수 있어 반가웠다.

 마을을 들어서면서 우측을 보면 길가에 나이먹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접근을 막는 울타리가 있어 글씨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 옆의 설명문을 읽어보니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이 비석의 이름은 三道 海運判官碑이고 비가 서있는 이곳은 水路교통의 요지로 삼도의 세곡을 모아

이곳에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운송을 하였다.

이곳의 책임자를 해운판관이라 하였고 이들의 깨끗한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바로 이 비석들이다.이 석축은 그동안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석축의 잔해들을 한곳에 모아 쌓아놓은 것이다.

 마을길로 들어서니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고향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이것이 가난의 상징인지는 모르겠으나 훈훈한 고향의 정을 느끼게 해주니 나는 역시 촌티를 벗지 못하는 촌놈인가보다.

 그 뒤 고샅으로 오르니 시대가 30년 전에서 멈춰버린 또다는 풍경이 나를 반긴다.

 저 앞쪽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어 다가가 본다.

 이 커다란 질항아리는 쓰임새가 많기도 하던 물건이었다.

틈새가 하나도 없던 젊은 시절에는 물독으로, 그 후에는 간장독으로 제 임무를 다하다가 세파에 시달려 몸에 금이라도 가면 철사로 꽁꽁 동여매 곡식을 담아두는 뒤주로 역할을 바꾼다.

그러다가 도무지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진창길에 자갈 대용으로 깔려서 천수를 다하게 된다.

 

 원색의 슬레이트 지붕만 아니면 콧물이 줄줄 흐르는 조무래기 친구들이 뛰어 나올것만 같은 고향의 풍경이다.

 질항아리 저편으로 도시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이곳도 얼마 안있어 아파트 숲으로 덮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고향의 정경에 한참이나 눈길 머물렀다.

인간이 사는 곳이기에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밀려 언젠가는 그 모습이 변해가겠지만

이 순간 만큼이라도 고이고이 눈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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